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예나 Aug 23. 2020

그렇게 커서 뭐가 될래?

그 아이는 커서 기술자가 됩니다.

부모님과의 전쟁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컴퓨터’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1997년 내가 태어나던 때 상용화되기 시작한 컴퓨터는 한참 유년기를 보내던 시절 나에게 있어 가장 흥미로우며 자극적인 호기심 거리였으니 말이다. 쏟아지듯 나오는 전자 기기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비디오 게임 등의 오락이 자녀에게 있어 악영향을 미칠 거로 생각했던 부모님은 어떻게 해서는 나와 오빠가 그것들을 못 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 또한 부모님이 싫어하는 ‘남자아이 같은 행동’ 중 하나였다.


하지만 2000년 8월 배포된 교육부의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초. 중등 정보통신기술 활용 교육 운영지침이 초등 교육에 반영되었으며. 학교 안에서 컴퓨터 교육을 진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에 배치된 컴퓨터 자체를 없앨 수 없었고 교육에 대한 욕심이 강했던 부모님은 그런 교육 변화에 따라 나를 컴퓨터 교실로 보냈으며, 초등학교 1학년부터‘한글’ 프로그램에 대한 사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의 기억의 시작 또한 컴퓨터와 함께한다. 지금처럼 얇은 화면의 컴퓨터는 아니다. 지금은 유물처럼 기억되는 뚱뚱한 모니터에 하늘색 배경 마이크로소프트의 Windows 98 SE. 


2018년 6월 18일을 기준으로 20주년을 맞이했다고 나와 비슷한 연배의 그 프로그램은. 인터넷 시대가 열렸다는 2000년도에 가정용 컴퓨터를 책임지던 안방 (OS) 운영체제였다.


부모님은 컴퓨터를 들여놓고 ‘공부용으로 써야 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지만. 오빠는 항상 부모님 몰래 컴퓨터로 게임을 했다. 오락실 게임이나 CD 게임을 다운로드하여 플레이하던 그는 2인용 게임을 할 때마다 나를 옆에 앉혔다. 주로 ‘킹 오브 파이터즈’나 ‘드래곤볼’ 같은 격투 게임, 혹은 포켓몬스터 같은 게임이었다. 언젠가 집에 혼자 남았을 때 나는 오빠가 게임을 다운로드하는 것이 신기해 따라 해 보겠다며 컴퓨터에 접속해 이것저것 눌러보다 그만 바이러스에 걸려 크게 혼이 났다. 아마 된통 혼이 난 이후로는 한동안 컴퓨터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것 같다. 


오빠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에는 제법 머리가 자란 오빠와 나는 부모님이 없는 시간 몰래몰래 컴퓨터를 하기 시작했고 부모님은 인터넷 사용 기록을 뒤져 허락받지 않은 컴퓨터 사용에 대해 혼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빠와 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인터넷 사용 기록을 삭제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부모님의 '인터넷 기록'탐색을 통한 컴퓨터 사용 통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빠와 내가 인터넷 기록을 손본다는 것을 알아낸 부모님은 결국 컴퓨터를 암호로 잠가두었다. 하지만 오빠와 나는 어떻게 해서든 컴퓨터를 사용해 낼 방법을 알아내어 몰래 컴퓨터를 사용했다. 


부모님은 당시 부모님 사이에서 유행했던 '아리.라는 컴퓨터 사용 제약 프로그램을 찾아내 그것으로 사용 시간을 통제했다. 각 사람당 주어진 시간 1시간.    


한 시간이라니 정말 야박하고 야속하기도 한 시간이다. 나와 오빠의 욕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또다시 그 프로그램을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렇게 컴퓨터 한 대를 두고 부모님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컴퓨터 사용을 통제할 방법을 찾는 부모님들과. 어떻게든 뚫을 방법을 찾는 오빠와 나. 나는 산만하긴 해도 하나에 꽂히면 무서운 집념과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고 오빠는 정보가 빨랐다. 


부모님이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올 때마다 둘의 대책 회의가 시작되었으며, 강한 집념을 가진 둘의 조합은 어떤 장벽도 소용없게 만들었다. 어쩌면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 그 자체보다 부모님이 만들어둔 방법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 그 자체에 희열과 즐거움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부모님은 우리의 공격에 매번 무너졌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문명을 접했던 우리와 새로운 신문물로서 디지털 문명을 받아들인 부모님과는 컴퓨터 접근의 방식부터 달라서 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교육학자인 마크 프렌스 키 Marc Pren sky는 이러한 디지털 패러다임 속에서 생장한 사람은 디지털 언어와 장비를 마치 특정 언어의 원어민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의미로 디지털 네이티브라 명명하였으며. 성인이 되어 디지털 패러다임에 편승하게 된 세대는 이전 세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하여 디지털 이주민이라 명명하여 그 차이를 두었다. 그 디지털 네이티브는 인터넷 속에서 주도적으로 정보를 생산하고 제공하는 역할에 익숙했다.


오빠와 나는 어릴 때부터 디지털 세계를 접해온 아이들은 공간과 시간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광활한 디지털 정보의 공간 ‘사이버스페이스’의 주민으로서 자라오며. 자연스럽게 다양한 정보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것에 익숙해진 '디지털 네이티브'였던 것이다.


 인터넷 속에는 오빠나 나 같은 아이들이 또는 정보 보안에 관심이 많은 어른이 한대 모여 커뮤니티를 만들어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고 매일 새로운 정보가 올라왔기에. 부모님들이 사용하는 ‘잠금장치’ 들은 컴퓨터를 죽도록 사용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열정과 그 열정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소통망에 의해 쉽게 무너져 버렸다.


 부모님은 결국 프로그램을 사용한 ‘소프트웨어적’인 방법으로는 우리를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컴퓨터 모니터를 용접(?)해 가로등 타이머를 장착해 자물쇠로 잠가 버렸다. 


 사실 그마저도 옷핀으로 자물쇠를 뜯는 방법까지 알아냈기 때문에 그 방법 또한 한계가 존재했지만. 오빠와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을 화나게 한다면 컴퓨터가 멀쩡해지지 않을 거라 느꼈기 때문에 집안 컴퓨터 사용에서의 항복을 선언(?) 피시방으로 거점을 이동했다.


부모님은 그렇게 끝끝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치열하게 컴퓨터를 해야만 하는 나를 보며 “너는 여자애가 도대체 왜 그러냐. 커서 뭐가 될 거냐?”는 질문을 던졌다. 


 당시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스스로를 주체 못 하는(?) 악동이었던 나도 내가 커서 뭐가 될지 참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때부터 내 진로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태어나 최초로 한 해킹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컴퓨터를 간절히 사용하고 싶은 아이들은 생각보다 타인의 보안을 침범하는 행위인 ‘해킹’을 쉽게 배운다. 어떻게든 부모님이 설정한 ‘보안’을 뚫고 컴퓨터를 이용하고자 하니까. 내가 만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린 나와 부모님을 본다면 붙잡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 속이 좀 많이 갑갑하시겠지만은.. 다행히 저 아이는 커서 컴퓨터로 돈을 벌어먹고 삽니다. 좋은 방향으로요.” 


지금이야 부모님 께서도 내가 컴퓨터로 삶을 영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에 크게 제지를 하지 않는다. 이제는 부모님이 그렇게 싫어하던 컴퓨터를 종류별로 운영체제별로 세대나 소유한 컴퓨터 부자가 되어있다. 어디엔가  지금 프로그래밍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 중, 그 커뮤니티를 공유했던 나 같은 악동이 또 있지 않을까? 


물론 그중 '손' 씨 같은 디지털 성폭력의 가해자들도 있을 거라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의 '삐삐'들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