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근대 이후 한국 여성사 이야기
1897년 2월 27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 이 체결되었다. 이는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이루어진 불평등 조약이었으나.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수 세기 동안 유지해온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해체되며, 일본을 비롯한 서구 각국과 교류하게 되며 때마침 찾아온 미국의 선교 부흥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찾아들게 되었다.
이는 유교적 전통사회 속에서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여성을 강요해왔던 우리 사회의 '여성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와 여성 교육의 변화까지 끌어낸다.
우리는 부산항에 24시간 동안 머물 것이다. 멀리 보이는 언덕과 산들은 매우 가파른 바위 투성이었다. 무척 황폐해 보였다. 몇몇 조선인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 옷을 입었다. 그런데 모두 남자들뿐이었다. 조선의 여성들은 이름이 없다. 여자들은 해가 질 때까지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 선교사 로제타 홀 _ 1890 9월 24일 일기
1837년 미국 최초로 여성을 위하여 세워진 대학교 ' 마운트홀리요크대학' 의 총장 메리 라이온은(Mary Lyon) 미국 여성들의 선교에 힘을 불어넣는 연설을 한다.
"인류에 봉사하려거든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해라" - 메리 라이온의 연설
당시 미국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사는 것을 특별한 부르심으로 여겼고, 메리 라이온의 영향으로 많은 미국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선교에 참여했다. 개항 이후 조선에도 많은 선교사가 찾아들었고 그중 메리 스크랜튼과, 로제타 홀이 존재했다. 이들은 한국 여성인권 증진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53세이던 1885년 조선 땅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선 교부 용지에 남자가 소유하고 있는 가옥을 사들였고, 그 초가집을 고쳐 이화 학당을 설립을 추진했다. 또한 스크랜턴 부인의 이화학당을 시작으로 하여, 미국의 여성 선교사들은 주요 도시 곳곳에 기독교 여학교를 설립했다. 대표적인 학교로는 정신(1887) 영화(1892) 정의(1894) 일신(1895) 배화(1897)등이 있다.
하지만 당시 여성 교육을 기피하는 가부장적 사회 풍조와 서양인에 대한 배척이 더해져 초기 학생 유치에 큰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다 스크랜턴 부인은 1886년 5월 31일 드디어 한 사람의 여성을 학생으로 맞이하는데 그것도 학생의 어머니에게 학생의 성년까지의 신변을 보증한다는 서약서까지 작성하고 입학시킨 것이다.
당시 남성의 그림자로서 존재하다시피 했던 조선 땅에서 여학생을 유치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았고. 그 고충은 이화 이후 세워진 다른 선교사들의 학교 또한 마찬가 지었으며. 대부분의 학교가 부랑하는 아이나 가난한 집의 아이를 학생으로 얻어 이를 숙식을 모두 제공하며 양육하고 교육하기에 이른다. 이에 1887년 명성황후는 스크랜턴 부인의 노력을 격려하고자'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주었다.
또한 스크랜턴은, 조선에는 여성이 남자가 운영하는 병원에 갈 수 없는 악습이 있는 까닭으로, 한국 여성들만을 위한 병원 설립 기금의 청원을 미국 감리교의 여성 해외 선교부에 제출하였으며. 이것이 승인되어. 이화학당의 구내에서 여성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의 최초 여성 병원 '보구여관'이 되었다. 보구여관에서는 이화의 여학생 졸업생 5명이 선교사 로제타 홀에 의료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는 1928년 경성 여자 의학 강습소로 발전되어 여성을 위한 공식적인 의학교육 기관의 토대가 된다.
이후 충청도 홍주에 가난한 양반집에 태어나 전쟁으로 일찍이 남편을 잃게 된 '이경숙'은 친정에 머물며 살다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가 죽으며 가세가 기울어 친척 집을 전전하며 가사를 돕는 곤궁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하지만 우연히 친척을 통해 스크랜턴을 만나게 되었고. 조선 전통사회에서 천대받고 멸시당하던 가난한 집의 과부를 귀한 손님으로 맞이하는 스크랜턴의 태도에 놀랐으며. 스크랜턴 부인의 양딸이 되었다. 양반 가문에 태어나 한글과 한자를 익히고 있던 그는 한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많은 부녀자에게 서양문명을 이해시키는데 힘썼고. 그 후 여학교의 학생 수가 많이 늘어나게 된다. 그는 근대식 여학교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1898년 9월 1일 북촌의 양반 여성이었던 이소사 김소사를 명의로 '여성도 사람이다'라는 「여학교 설시 통문(女學校設施通文)」『여권 통문』이 발표되었으며. 여성단체 한국 최초의 여성단체 ‘찬양회’가 만들어졌다. 찬양회는 여학교 설립 후원을 목적으로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모여 발족하였다. 이는 4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고 집회 때마다 방청인이 100여 명 정도 모일 정도로 큰 집단이었다. 이들은 '관'이 주도로 하는 관립 여학교 설립을 위해 회원 '100'명과 대궐문 앞에 나아가 관립 여학교 설립 청원 상소문을 고종 황제에게 제출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여성 교육에 냉담하였고, 1899년 2월 26일 어의동에서 여학생 30명으로 순성 여학교를 개교하였다. 찬양회는 순성여학교를 관립 여학교로 만들자 했지만 재정 부족 및 여성 교육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실현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는 한국인에 손에 세워진 최초의 여성학교이자. 여성 민간인이 설립한 학교이다. 교장 양현당 김씨는 1903년 사망하기까지 사재를 털어 여성 교육에 전념하였다. (신여성이야기)
1895 명성황후가 시해된 사건 을미사변 이후 1905년, 을사늑약 채결이 되며 본격적인 국권 침해가 시작되자 개화자강파를 중심으로 '나라가 부국 자강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산업이 발전을 통한 실력양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이 퍼져 나갔으며 각종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애국계몽운동 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교육구국운동育救國運動이었으며. 당시 사립 학교의 수가 2,300여개에 달하였음으로 운동의 여파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구국 열풍 속에서도 가부장적 가치관 아래 여성 학교 설립은 미진한 움직임을 보였고, 1903년 황귀비가 된 순헌황귀비 엄씨가 나서서 지원을 시작한다. 엄씨의 지원에 의해 1905년 양정의숙(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진명여자고등학교와 사립명신여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이 설립되며 . 이후 고육구국운동과 여성 교육의 필요성이 퍼져나가며 '동덕의숙'(1908)이 설립되기 까지 이른다.
100여년 전 수많은 여성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한국땅에도 여성 교육의 시대가 열렸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며 계속 더 나은 미래를 써 나아갈 것이다.
블로그에 한국 여성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경기도에서 이뤄진 조선의 개항… 한국 근현대사 시작이 되다[중부일보] , [정재걸의 역사 속 교육]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 다큐맨터리 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 메리 스크랜턴과 로제타 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구여관 이화학당 구국교육운동 동덕여자고등학교, 역사속의 이화 메리스크랜톤 , 이화학당과 메리스크랜턴 선교사 , 감리교회 역사자료 검색 서비스 이경숙 , 책: 닥터로레타 홀 ,책 :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2, 우리역사넷 찬양회 , 신여성이야기 ,스크랜턴대부인 블로그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