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빈의 "중국 인식의 파편화"를 읽고
고성빈, “중국 인식의 파편화 - 동아시아 시각”, 대학지성 In&Out (2022),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76.
언제부터인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아마 홍상수 감독이 제작한 동명의 영화(2015) 이후인 것 같은데, 기실 영화의 제목은 고대 중국의 문인 타오위안밍이 벼슬에서 내려와 귀향할 때 쓴 시 “귀거래사”의 한 구절이다. “覺今是而昨非,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잘못된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네”. 홍 감독과 배우 김민희가 불륜을 시작한 시기가 이 영화를 찍을 때부터라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아니, 제도를 벗어나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이의 다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딱히 아이러니할 일도 아니다. 시기를 강조한 두 예술인이 시대를 초월하는 관념을 공유한 것일까.
나로서는 이 역시 아이러니하지만.
논설자의 주장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시간의 착각”.
표면적으로는 특정 시간대에 고정된 편파적인 인식으로 타자의 실재성을 왜곡하지 말라는 일침이다. 논자는 서구에서 중세 기독교사회와 근현대사회가 후진과 선진으로 엄연히 구분되어왔듯 고대 중화문명시대의 우수성과 근대 중국 혁명의 가치를, 현대 중국 문화의 후진성을 각각 인정하는 것이 곧 중국 인식에서 객관성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표피를 한 꺼풀 벗겨내면 논자가 지닌 진정한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국가 자주성 확보를 위해 국민이 타국의 존재에 대해 취해야 할 윤리적 자세가 그것이다. 취지가 그렇다면 ‘시간’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에 대해 다시 논해보자. 변증법이라는 일반적인 운동 법칙은 우리의 사유를 시간의 틀 안에 가둔다. 시간의 덫에서 나누는 윤리성 담론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가령 원시시대에 종족 번식을 위해 인류가 선택한 생존방식이 후대에는 근친상간으로 금기시되는 행위가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근친혼 터부는 문화에서 동성동본 금혼제도로 발전했다가 범위가 개정되었고, 근래에는 헌법재판소에서 심사까지 진행되었다. 만일 지금보다 자유권이 더 중시되고 인정받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훗날에는 근친이라는 이유로 혼인의 자유를 침해한 이때가 틀렸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정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배제하거나, 현재의 옳고 그름이 덧없음을 시인한 상태에서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올바름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다면 논자의 목소리에 실천의 날개를 달기 위해 우리는 다시 공간의 틀 안에 제약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