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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소포인트 Mar 21. 2021

오슨과 맹키위츠, 데이빗과 잭

맹크 (Mank, 2020)


영화 밖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맹크>가 핀처의 오랜 염원이었다는 것과, 아버지 잭 핀처의 각본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영화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어느 층위에서든 핵심적인 사안이다. 그런 의미에서 <맹크>는 데이빗 핀처의 작품에서 독특한 위치를 가진 작품인데 그는 영화를 찍는데 흑백을 고집했고, 그렇기 때문에 넷플릭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제작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는 왜 그토록 <맹크>를 찍고 싶었을까. 나는 여기서 반대의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그가 <맹크>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이미 흘러버린 시간 때문에 <맹크>를 찍은 것이 아닌가 말이다. 영화를 둘러싼 배경은 <시민 케인>을 둘러싼 그것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이빗 핀처는 <시민 케인>을 둘러싼 신화를 한 꺼풀 벗겨내고 싶어서 <맹크>를 만든 것일까. 허문영(필로에서의 글)의 지적처럼, 그는 연출과 현장의 중요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했던 감독이었기에 새삼스레 각본이 영화 탄생의 기원임을 암시하는 <맹크>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아닐 테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 영화를 둘러싼 우리에게 전하는 데이빗 핀처의 거대한 프로젝트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맹크>는 명백히 데이빗 핀처가 영화 밖 자신까지 끌어들여 촘촘히 설계한 다중 프레임 영화다. 영화를 둘러싼 정보를 알고 본다는 가정하에, (혹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정보를 찾아 알게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맹크>를 보면서 필연적으로 영화 밖 세계와 영화 안 세계를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맹크>의 내러티브는 <시민 케인> 안팎의 세계를 분리한다. <맹크>가 흑백 영화인 이유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영화는 수많은 실명들을 거론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하고 침침한 톤의 흑백으로, (다소 기만적일지라도) 필름이 돌아가면서 뚫려있는 구멍을 표현하면서 그 실존을 관객과 분리시킨다. 흘러가버린 기억임을 감독은 결코 잊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양가적 속성은 영화 전체에도 적용이 된다. <맹크>는 <시민 케인>에 대한 수많은 오마쥬가 내재되어있지만 정작 그 이미지를 만든 오슨 웰즈(<시민 케인>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촬영감독 그레그 톨런드는 더더욱)는 철저히 배제되어있다. 맹키위츠(게리 올드만)라고 다른가.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정작 스튜디오에 남을 수 있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이유다. 이렇듯 영화는 안에서 끊임없이 영화 안팎을 분리하고 생각하게 한 다음, 감독은 그 자신을 이용해 <맹크>를 바라보는 우리의 경계도 분리해버린다. 앞의 명제로 돌아가 우리는 맹키위츠를 아버지 잭 핀처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각본가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맹크>의 각본을 쓴 사람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미묘하게 사실과 다른 고증(이 역시 허문영의 지적처럼)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나이 때로 설정되었어야 할 40대의 맹키위츠는 60대의 게리 올드만의 얼굴로 대체되고 결코 60대의 나이를 숨기려 들지 않는다. 여기서 나이가 반복해서 드러나는 존재는 오슨 웰스뿐이다. 둘이 대면하는 씬을 보면, 맹키위츠는 아버지뻘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어느새 오슨 웰스를 데이빗 핀처로, 맹키위츠를 잭 핀처로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 <맹크>가 촬영되기 전까지의 시간은 중요해진다. <시민 케인>을 둘러싼 이야기가 꽤나 나중에 알려졌듯, <맹크>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데이빗 핀처는 영화 안팎을 넘나들며 도대체 무엇을 의도했단 말인가. 놀랍게도 그것은 <시민 케인>의 구조와 닮아있다. ‘로즈 버드’라는 한 마디의 말로 시작하며 그 단어의 의미를 추적해가는 구조처럼, 데이빗 핀처는 <맹크>를 빌어 자신의 의도를 추적하게 만든다. 그 의도는 다시 영화 안으로 화살을 돌리게 만든다. 영화는 <시민 케인>이 아니라 할리우드의 신화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불후의 명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에서조차 결국 계급의 협잡과 위선이 사로잡고 있음을 오슨 웰즈의 힘들었던 이후의 작품 행보가, 그리고 <맹크>가 제작되지 못했던 어려움을 통해 핀처 부자는 스스로 그것을 함께 증명해낸다. <맹크>는 핀처 부자가 20년 전 과거와 현재, 미래에 동시에 띄워 보낸 편지인 셈이다. <맹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부한 주제를 재현하면서 빛나는 영화가 아니라, 재현을 영화 밖 자신과 함께 실천하며 이루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빛나는 영화다. 우리는 그 편지에 응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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