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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돌 Apr 07. 2020

환영식 치고는 이건 좀...2

[트레킹 이야기] 강릉 바우길 1구간  '선자령 풍차길'


그 개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30미터쯤 앞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바로 그 길에서 살짝 비켜서서 말이다. 이번 녀석은 딱 봐도 들개다. 회색, 갈색, 흑색 털이 몸을 뒤덮고 있는 모양새가 흡사 코요테 같다. 좀 전에 산만한 개를 만나서인지 이번에는 조금 더 천천히 시선을 거둔다. 그래 봤자 그 시간은 겨우 1초 정도일 뿐. 나는 모터 시동을 꺼트리고 말았다. 까맣고 크고 다리가 길었던 그 개 때문에 발에 모터를 단 듯 정신없이 걸어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급브레이크가 걸리자 몸이 휘청댄다.


'모터 사망'을 선언하고 발이 땅에 얼어붙자, '짜~안'하고 다시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언제 집어 들었는지 나무 작대기가 들려있다.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뒤돌아가야 하나? 아까 그 개가 '너네 이럴 줄 알았다'는 눈빛을 발사하면서 길을 가로막고 있으면 어떡하지? 별 생각이 다 드는 순간이다.


  "어, 저 놈 봐라, 째려보더니 오줌 싸고 가네."

  "진짜? 진짜 간 거 맞아?"

  "나 따라서 빨리 걸어와. 재궁골 쪽으로 갔어."

  "산타는 사람들이 왜 스틱을 갖고 다니는지 알겠다."


그러고 보니 바우길 17개 구간을 걸어보겠다며 의기양양했던 우리 손에는 스틱 하나가 없었다. 선자령 정상은 해발 1157m. 트레킹을 한다는 생각이 앞선 탓일까? 다소 평탄한 길을 걸을 거라는 생각에 등산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터라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던 거다. 준비가 부족했던 탓. 그리고 너무 쉽게 생각한 탓이었다.


물론 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스틱은 위험한 동물과의 접전이 벌어질 때 무기로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스틱은 힘든 무릎을 보조하는 도구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던 피라미 트레커들에게 하늘이 준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늘이시여, 이 번 한 번 아니 두 번만으로 족합니다. 더 이상의 벌은 내리지 마소서. 제~발~'



개에 대해 이렇게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던가? 선자령 정상으로 가는 길에 늘어선 울창한 전나무 숲길과 계곡길은 이미 뒷전. 선자령 자락 굽이굽이마다 우리의 멍멍이 얘기가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다. 내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알람 메시지를 그에게 친절히 읽어준다.

  "대출금 갚는 날"

  "오늘 대출 이자 빠져나가는 날인가?"

  "19일이잖아."

  나는 애써 덤덤히 말해본다.


 "바우길을 걸으러 왔어도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거지.
   이 비현실적인 순간에도 현실은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고."

  "그 알람이 증거네."

  피식하고 웃음을 입가로 흘러버렸다. 아마 그도 그랬던 것 같다.


 

11시가 좀 넘어선 시간, 우리는 풍차가 서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우뚝 풍차가 머리 위에 솟아있다. 풍차 저 너머에서 안개가 밀려왔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좀 앉아봐. 삼각김밥 먹자."

  나는 풀썩 주저앉았다.

 

  "왜? 아직 정상 도착 안 했는데... 선자령 정상에서 먹을 거 아니었어?"

  개 두 마리 만나고 대출금 알람에 정신줄을 놓은 게 틀림없었다. 풍차만 보고 여기가 정상이려니 생각해버린 거다. 그의 말에 겨우 정신줄을 잡은 나는 멋쩍게 엉덩이를 슬며시 들어 올린다. 두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그가 말을 건넨다.


  "그냥 앉아있어. 대출금이나 넣자고."

  "그래, 어차피 오늘 해야 하는 일이니까. 선자령 정상에서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기가 낫겠다."

  "여기에서 통장에 돈 넣어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정상 올라가자."


대출금을 갚을 여윳돈이 있는 건 아니다. 그가 마이너스 대출을 받은 후 대출이자가 빠져나가는 나의 통장에 이체를 하는 것이다. 빚을 연체하지 않기 위해 빚을 내는 뭐... 그런... 절대 홀가분할 리 없는 일이다. 게다가 오늘은 큰 맘먹고 바우길 걷기를 하러 나선 첫날이 아니던가... 그 길 위에서 은행업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길을 걷든 걷지 않든 채무자 신세인 건 매 한 가지. 그럴 바에야 걷는 것이 낫겠다고 결정하고 나선 길이었다. 차라리 첫째 날 이런 골칫거리를 해결해버린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합리화를 해본다. 합리화라는 자기 방어기제를 이 깊은 산속에서도 쓰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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