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 30분. 드디어 선자령 정상에 올랐다. 정상석을 중심으로 저 멀리 백두대간의 큰 줄기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계방산, 오대산, 황병산, 발왕산 등 백두대간을 이루는 멋쟁이 산들이란다. 한 번도 올라보지 못한 산들이 대부분이고, 오대산을 제외하고는 이름마저 낯설다.
기운이 넘쳐 보이는 60대로 보이는 한 어르신이 우리가 내려갈 쪽에서 나타났다. 이내 다가오더니 사진을 부탁한다.
"여기는 백두대간 걸을 때 몇 번 와보긴 했지. 이번엔 혼자 와서 사진 찍을 수 있을까 했는데..."
저 산들을 걸어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에 휴대폰을 얼른 넘겨받았다. 어르신은 정상석 앞에 최대한 멋들어지게 포즈를 잡으신다. 멀리서도 찍고 가까이서도 찍는다. 마음에 안 드시면 어쩌나 염려하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돌려드렸는데 다행히 별말씀이 없으시다. 별말씀이 없는 건 마음에 안 드신 걸 지도...... 어쨌든 간에 요즘은 편집 기술이 워낙 뛰어난 세상인지라 예전에 비해서는 찍을 때 부담감이 덜하긴 하다.
"여기 올라오는데 개가 있더라고요. 얼마나 놀랐는지......"
혼자 내려갈 어르신이 걱정되어 말을 건넨다.
"개도 보면 키우는 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깐. 그런데 여기 올라오는 길에는 별로 볼 게 없더라고. 내려가는 길이 볼만 하지."
'아, 정말요? 그놈의 개 때문에 올라오는 길을 제대로 감상도 못 했는데, 이제 우리가 내려갈 길은 볼만한 게 없다니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신다. 아쉬운 마음을 가진 채 아까 어르신이 올라오던 그 길로 발을 내딛는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뭐야, 이렇게 멋진 광경이 펼쳐지는데 볼 게 없다니......? 백두대간을 밟아보신 분이어서 그런 건가?
'어르신이 별로라던 광경에 홀딱 빠져버려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고요. 오늘 심장 여러 번 멎네요.'
너른 초원에 자리 잡은 하얀 풍차들이 마음을 먼저 빼앗는다. 휘~이잉 휘~이잉 소리를 내며 날갯짓을 하는 풍차들 밑으로는 풀꽃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몇몇 사람들이 가느다랗고 기다란 길을 따라 걷고있다. 과연 대한민국 백패킹의 3대 성지다운 모습이다. 그는 영화 글래이에이터(Gladiator,2000)의 막시무스가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천국으로 향하며 그랬듯 곱게 자란 풀들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진을 찍으라고 독촉을 해댄다. 별일이다. 급기야 카메라를 내 어깨에서 낚아채 가져가기까지.
"저기 앞에 걸어가 봐."
잉? 나 사진 찍어주는 거야? 별일이 또 생겼다. 부탁하기 전엔 먼저 사진을 찍어주는 일이 거의 없는 분께서 웬일이람? 눈으로만 담기에는 너무 아까운 경치였던 모양이다. 사진 찍는 실력을 알기에 인생 샷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도 뭐 결과물을 보니 그럭저럭 편집하면 쓸만하겠다 싶다. 미안하지만 경치가 다했다.
짙은 안개가 몰려왔다 사라지기를 계속 반복한다. 이제 우리는 안개를 따라 이어지는 숲길로 내려간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숲길은 전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활엽수들로 가득하다.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나뭇가지 두 개를 휘저으며 숲길을 내려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 참 정겹다. 정다운 이 사람과 걸을 앞으로의 열여섯 개 길도 오늘만큼만 정겹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그나저나 저 나뭇가지는 내일에도 쓰려나? 보자... 4구간에도 개가 나타날 곳이 있는지...?!
ABOUT 바우길 1구간 선자령 풍차길 (출처:강릉 바우길 홈페이지 www.baugil.org)
코스길이 12km (소요시간 4~5시간) 코스 난이도 중급 등산화, 도시락, 간식, 물 준비
야트막한 고원에서 푸르게 펼쳐져 있는 양떼목장 울타리와 멀리서 바라보면 산 위에 흰 바람개비처럼 펼쳐져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풍력단지를 따라 백두대간의 등길을 밟고 걷는 길입니다. 정상은 해발 1157미터이지만 출발점의 높이가 850미터쯤 되는 곳이어서 걸을 때 그다지 오르막이 심하지 않습니다. 백두대간 등줄기에서 영동과 영서지방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의 천국을 이루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