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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Sep 02. 2024

[산티아고술례길] 환대 그 자체, 베르데 알베르게

산티아고순례길 22일 차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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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22일 차
2018. 6. 4. 월요일
레온(Leon) -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


환대가 가득한 곳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에 머물기로 한 건 순전히 베르데 알베르게 때문이었다. 이곳은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약 한 달 전, 같은 길을 걸었던 친한 언니가 알려준 곳이었다. 아무 계획도 없던 내게는 근접해서 다녀온 사람의 말이 귀하기도 했고 특히 ‘다시 가고 싶은 알베르게’라고 소개했던 덕에 마음이 동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고 나서, 왜 언니가 그렇게 추천을 했는지 단번에 느껴졌다.


우리는 새벽 내내 걸어서 보통의 순례자보다는 일찍 도착했는데, 체크인이 가능할지 쭈뼛거리는 우리를 보면서 걱정 말고 들어오라며 편하게 맞아주었다. 안내를 받아 알베르게로 들어가는 길에는 작은 텃밭과 소담한 나무들, 해먹과 휴식 공간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차있었다. 누군가는 요가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고 있었고, 귀여운 큰 강아지들이 즐겁게 마당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알베르게는 아직 청소를 하고 있는 시간이었는데 우리가 바로 샤워를 할 수 있도록 샤워실을 빨리 정리해 내어 줬다. 편하게 낮잠을 잘 수 있도록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도 배정해 주었다. 밤을 새우며 걸었다는 이야기에 우리의 몸 상태가 괜찮은지 챙겨주기도 했다. 진심으로 우리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보통 까미노에서 알베르게의 스탭을 부를 때 ‘호스피탈로(hospitalo)‘라고 부른다. 지금까지는 순례자가 머무는 공간인 'hospital'의 사람이라는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베르데 알베르게의 스태프들을 만나고 나서는 ‘hospitality(환대)’로까지 의미가 확장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를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환대'였다.


베르데 알베르게 다운 문패


순례길의 요가 클래스

베르데 알베르게는 순례자들과 함께 보내는 특별한 시간으로도 유명하다. 요가&명상 클래스와 유기농으로 직접 키운 재료로 만든 채식 저녁식사 프로그램이 있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참여비는 도네이션(기부제)으로 운영되고 있어 원하는 만큼, 형편에 맞춰 보답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요가 클래스를 하러 작은 강당으로 모였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 알베르게에 머무는 거의 모든 순례자가 모인 것 같았다. 성비가 반반인 것도 놀라웠는데,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남자 요기니가 많아졌지만 당시에는 한국에서 ‘요가’하면 여성들이 많이 하는 운동이라 여겨질 때라 더욱 그랬다.


요가 선생님 민초가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고 간단한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는데도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났다. 조금씩 난이도를 올리자 다들 얼굴이 빨개져서는 수선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속사포처럼 오마이갓을 외치거나 신을 찾고, 누군가는 바닥을 굴러다니고, 누군가는 더 이상 몸이 자기 마음처럼 되지 않아 의아해하고, 누군가는 요가 선생님이 하는 포즈가 과연 사람이 할 수 있는 표정인지 의심 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야말로 우당당탕 요가반이었다. 나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너무 웃겼지만 처음 본 사이에 실례를 범할 수는 없어 자꾸 인중을 늘렸다. 그러다가 누가 방귀를 뽕 뀌었다. 그 순간 모두가 함께 웃음이 터졌다.


한풀 누그러진 분위기는 자리를 좀 더 편하게 했다. 옆에 있는 순례자들과 자연스럽게 공감을 (정확히는 끙끙거림을) 나누며 요가를 할 수 있었다.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는 동작에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멋쩍은 표정을 공유하고, 선생님의 시범에 함께 감탄하고, 꽤나 잘 따라 하고 있다면 박수와 응원을 보내며 요가 수업을 마무리했다. 모두가 빨갛게 달뜬얼굴이었다.


민초는 요가 수업을 끝내고는 명상시간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뱉고, 입으로 음- 하고 소리를 내는 걸 되풀이하면서 명상이 시작되었다. 명상을 제대로 해본 건 처음이었는데, 그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다 보니 빠르게 내 몸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횡격막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 공기가 내 코를 스치듯 지나가는 느낌, 내가 들이마실 수 있는 공기의 양, 숨을 완전히 내뱉었을 때 내 몸의 모양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생경한 경험이었다.


민초는 눈을 감고 있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 나는 누구인가?


처음부터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았다. 사실 이 길에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나와, 이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나, 여기서 만나는 친구들이 생각하는 내가 조금씩 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모습은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거지만, 지금까지 나는 다르게 생각해 왔었다. 그 간극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건 여태까지 나는 많은 부분을 생략하기도, 과장하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나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그 과정 중에 이 질문을 만나게 된 게 반가웠다.


민초는 다른 질문들도 연이어 던지기 시작했다.

-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 당신은 지금, 이곳에 있는가?

- 이곳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매일 하루를 온전히 보내고 있는가?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답하려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충분한 시간 속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해서 찾아 나갔다. 단순한 질문과 단어들이 울컥하게 다가올 때도 있었다. 저 멀리 있는 누군가는 코를 훌쩍거리기도 했다.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아주 말끔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초가 수업을 마무리하며 말했던 이 문장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Here and Now.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가장 어렵다. 심지어 순례길에서도 말이다. 매일 하루씩의 노력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이런 마음가짐과 행동이 쉬워질 날이 분명 있을 테다.



죽음으로 향하는 길

요가와 명상까지 하고 나니 벌써 밤 8시가 넘은 상태였다. 우리는 부엌으로 모여 다 같이 식사를 했다. 음식들은 여기서 직접 기른 것들로 만들었다고 했다. 사실 같이 걷는 친구들에게 이 알베르게를 오자고 하면서 저녁이 비건식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모두가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고기를 엄청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여덟 시간 정도 걷고 나면 고기가 끌렸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들 내 말에 따라주어 여기까지 왔어서 음식이 만족스럽지 못할까 봐 마음이 쓰였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여기의 저녁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정말 한 번도 이렇게 맛있는 채식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전식부터 메인 요리, 디저트까지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친구들의 표정도 밝았다. 다행이었다.


맛있었던 카레와 후무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지는 해를 보러 창문가에 모였는데 민초가 물어봤다. 왜 우리는 생장, 또는 어떤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걷는 것 같냐고. 감을 잡지 못하는 우리에게 민초는 말했다. 옛 순례자들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은 'birth'라고 생각했고 해가 지는 서쪽은 'death'라고 여겼다고. 그래서 생이 시작되는 동쪽에서부터 죽음을 향해 걸으며 세속의 욕망과 고난을 덜어내고,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게 될 때야 비로소 순수하게 'rebirth'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엄청난 위로를 받았다. 동시에 처음으로 이 길을 떠나오게 된 마음을 마주 보게 되었다. 순례길을 걷게 된 건 술값이 저렴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톺아보면 보다 말미암은 마음이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바라왔던 일을 그만두고 나서 내가 겪은 건 분명 방황이었다. 좋은 기회로 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일을 하게 되어 재정에 공백이 생기지는 않았어도 취준생, 백수, 직장인 중 나는 그 어떠한 신분도 아니었다. 취업 스터디에는 들었지만 실질적으로 회사에 지원하지는 않았다. 언론고시 스터디를 기웃거리면서도 언론고시를 볼 생각조차 없었다.


꿈을 위해 노력했던 기간만 8년이었다. 열정이든 희망이든 이미 그때 다 소진되어 버린 것 같았다. 어떤 걸 하고 싶은지도 몰랐고, 어떤 걸 직업으로 삼고 싶지도 않았다. 인생이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느껴졌다. 광화문이었나, 여의도였나. 우연히 출근시간 근처에 지하철 역에 간 적이 있다. 문이 열린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틈바구니 중 나 혼자만 그 사람들을 거슬러 걷고 있었다. 갈 곳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과 달리 아무 곳에도 소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 섬뜩하게 느껴져 주저앉고 싶었다.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는 마음을 풀 도리가 없어 선택한 게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무턱대고 걷다 보면 하나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내 안에 숨어있었다. 이를 인지하는 순간 그동안 못 본 척해왔던, 이미 퇴적된 지 오래된 낡은 생각들의 무덤이 보였다. 앞으로 걷는 동안 지금까지 덮어왔던 마음을 인정하고, 마주하고, 치열하게 고민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고, 그래야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해서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정말 온몸으로 죽음을 향해 걸으며 맞서야 했다.


식사 전 노래를 불러주던 민초와 스태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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