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22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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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22일 차
2018. 6. 4. 월요일
레온(Leon) -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
새벽에 출발해 밤을 새우며 걷기로 한 오늘. 하루쯤은 밤에 걷고 싶었긴 했지만 정말로 이 시간에 걷게 될 줄은 몰랐다. 혼자였다면 위험해서 시도도 해보지 않았을 일을 다섯 명이 모이니 서슴없이 하게 된다. 오늘 내내 새벽 카미노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둠에서 동이 트기까지의 여정을 길 위에서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소풍 가기 전날처럼 가슴이 뛰고, 대책 없는 무모함이 생기게끔 해준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출발 시간은 새벽 02:00시. 2~3시간이라도 자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에어비앤비를 하나 잡았다. 쉽게 잠을 자지 못하다가 출발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나서야 잠깐 졸았는데 '아무도 깨어나지 못해서 이대로 다 같이 출발을 못했으면'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을 정도로 정말 피곤하긴 했다. 그래도 기대감이 내 눈꺼풀을 기어코 들어 올렸다. 분주하게 짐을 챙기는 다른 친구들의 얼굴에도 반짝거리는 눈과 들뜬 입꼬리가 있었다.
레온에서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까지는 40km를 좀 덜 걷는 일정이다. 천천히 걸어서 점심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 크게 무리 가는 거리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마음껏 천천히 걸어도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아무래도 아침부터 걷다 보면 점심에는 바에서 때에 맞춰 점심을 먹고 싶은 마음과, 저녁 전에는 숙소에 도착해 빨래도 하고 장도 보고 싶은 마음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보다 확연히 느린 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걷는 편이었고, 때가 맞으면 숙소나 식당에서 만나곤 했지만 걷다가 만난 친구들이 내 걸음의 속도를 맞춰줄 때면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오늘은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곳이니 그래도 모두가 조금은 천천히 걷게 될 것이었다. 조금은 덜 미안해도 되는 날이었다.
레온의 새벽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며칠 동안 내내 시끌벅적했던 도시의 모습만 보다가 마주한 풍경이라 더더욱 낯설었다. 레온은 큰 도시라 한 시간을 넘게 걸었을 때야 도시가 희끗해지기 시작했는데, 뒤이어 미세한 소음조차 사라진 적막이 찾아왔다. 차도 별로 오가지 않는 길에, 있는 소리라고는 옷이 스치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 풀벌레 울음밖에는 없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종종 내게 '산티아고순례길은 정말로 많이 생각하게 되는 길이냐'라고 물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편이었는데 고요한 밤에 걷는 건 달랐다. 낮에 걸을 때는 하늘도, 구름도, 풀꽃도, 들판도, 까미노 친구들이랑 인사도 나눠야 해 생각한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면, 몇 뼘만큼의 가시거리만 보장되어 있는 새벽길은 수많은 생각이 피어나는 곳이었다. 땅을 내디뎌 나가는 속도만큼 생각 속에 충분히 머물렀다. 갈피 없는 생각들은 ‘나’로부터 시작했다가 친구들에게도 옮겨가기도 했다. 내 앞으로 걷고 있는 친구들의 머리 위에도 생각 꾸러미가 하나씩 있는 것 같았다.
들려오는 친구들의 발소리를 박자 삼아, 길 위의 성긴 가로등 불빛을 이정표 삼아 그렇게 생각 속을 유영하며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종종 화장실 이슈가 생긴다. 들판과 산을 넘어가며 걷다 보니 마을도, 화장실도 없는 건 당연지사. 음식점이나 바(bar)를 발견할 때에만 화장실을 갈 수 있어 미처 화장실에 들르지 못했거나, 볼일이 급한 사람들은 풀숲으로 뛰어들어 간다. 나도 걷다가 망을 봐준 적이 두세 번 정도 있다. 까미노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볼일에 대한 에피소드가 꼭 나오는데 아직까지 나는 한 번도 곤란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다. 이제까지 내가 별일이 없었던 건 바가 나올 때마다 성실하게 들러 음식과 술을 섭취한 후, 화장실까지 풀코스로 다녀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산티아고 순례길 22일 차. 새벽에 걷고 있어 아무런 화장실을 찾을 수 없는 지금, 나는 미치도록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화장실 갈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물도 찔끔찔끔 먹었건만 방광신이 문을 아주 쾅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외면도 해봤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속도보다 물리적으로 충만해지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그렇지만 길 양옆으로는 길게 자란 풀들이 드리워져 있고, 밟고 있는 길은 진흙으로 질척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옆으로 빠져서 볼일을 보다가는 동물이나 벌레, 또는 초자연적인 어떤 존재를 만날지도 몰랐다. 무조건 빛이 나올 때까지는 걸어야 했다.
와중에 우철오빠는 귀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재밌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다른 차원의 고통으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몸이 잔잔하게 떨리기 시작했는데 어떤 것 때문에 떨리고 있는 건지 아리송했다. 약 한 시간을 넘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다. 땅을 밟을 때 최대한 자극이 없도록 살포시 발을 내려놓기, 조금 힘들다 싶으면 등산 스틱으로 땅을 밀어내보기, 시냇물 소리 상상하지 않기 등등. 억겁 같던 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급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차례대로 인적이 드문 곳에서 서로의 볼일을 해결했다. 우리만의 비밀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다시 한참 걷고 있는데 누군가 외쳤다.
"해 뜬다"
새벽 6시가 가까워진 시간, 저기 땅과 땅이 마주한 곳에서 짙게 깔린 구름 사이로 정말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은 탓인지 하늘이 층층으로 갈라져 빨갛고, 파랗고, 노랗게 보였다. 우리는 조용히 멈춰 서서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들어 찍어보다가, 또 이 장엄한 광경이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아 다시 또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했다. 이걸 보기 위해 오늘 고생하며 걸어온 거구나 싶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바다에서 해가 뜨는 건 종종 봤어도 땅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진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늘은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했다. 그 초와 분이 아까워 우리는 눈도 떼지 않고 하늘만 봤다.
그렇게 망부석처럼 해만 보다가 발 빠른 웅민이가 다 같이 사진을 찍자며 우리를 불러 모았다. 저 멀리에 카메라를 놓고 포즈도 맞추며 여러 장 찍으며 함께 웃었다. 서로의 사진도 찍어주면서 연신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 이 순간이 내가 인생에서 오래 기억할 장면이라는 걸 깨달았다. 고생하며 걸었던 밤길, 형용할 수 없었던 해돋이의 과정, 쏟아지는 새벽 햇빛 아래 마음껏 뛰고 사진 찍는 이 순간. 한국에 돌아가서도 오래오래 지금을 기억할 것 같다.
새벽에 걷겠다고 한 건 걸으면서 해가 뜨는 광경을 보고 싶던 마음이 팔 할이었다.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버린 우리는 동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거의 쉬지 못한 채로 대여섯 시간을 걸은 탓도 있다. 낮에 걸을 때는 나무 아래 앉아서 쉬기도 했는데 밤에 걸을 때는 도통 어디 앉아 쉴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잠을 자지 못해 몰려오는 피곤에, 더워지는 날씨에 혼미한 그때 누군가 털썩 길가에 주저앉았다. 맞춘 것도 아닌데 우리는 기다렸던 것처럼 별안간 툭툭 쓰러지듯 앉아 풀밭에 앉았다.
걷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걸음을 멈추고 등산화를 벗자 인지하지 못했던 아픔이 한꺼번에 다가왔다. 발끝부터 찌릿찌릿하게 아픔이 타고 올라왔다. 계속 걷는 중에는 몰랐는데 등산화를 쥔 손과 팔에도 상당한 아픔이 있었다. 몸과 다리는 힘이 풀려 다시 걷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에 잠도 몰려오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이 길에는 우리말고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에라 모르겠다'하고 대자로 누워서 수건을 얼굴 위에 덮고, 등산가방을 베개 삼아 벌러덩 누워버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한 두 명씩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수건을 살짝 열어 다른 친구들을 보니 아무도 동요하지 않고 자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눕고, 또다시 슬쩍 봤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나중에 안 건데, 이렇게 슬쩍슬쩍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에는 잠에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시간이 넘게 누워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을 때야 일어나 몸을 끌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아침 아홉 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간에 드디어 연 바를 만나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아침과 모닝 맥주를 먹었다. 모닝 맥주를 때려 부은 건 조금이나마 취기를 빌려 더 잘 걸을 생각이었는데, 풀려버린 긴장과 모닝 취기, 그리고 밥을 먹어서 나른해진 몸은 우리의 눈을 자꾸 감겼다. 밥을 먹고 나와서는 거의 눈을 감으면서 걸었다. 초반에는 안락한 침대에 있는 상상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딱딱한 돌밭이라도 좋으니 10분만이라도 잠을 자고 싶었다.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채로, 오늘 머물 마을인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