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23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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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23일 차
2018. 6. 5. 화요일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 - 산타 까탈리나 데 소모싸(Santa Catalina de Somoza)
도저히 아침에 일찍 출발할 정신이 아니었다. 하루 밤새서 걸은 여파를 몸으로 받은 탓일까. 눈은 떠졌는데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먼저 출발한다는 사람들을 모두 보내놓고 알베르게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나왔다. 뭔가 몸도 무겁고 아무리 걸어도 잠이 달아나지를 않았다. 이럴 때는 바에 가서 맥주 처방을 받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바로 가 'cerveza jarra jarra(맥주 많이 많이요)'라고 외치니 주인 분이 아침부터 맥주를 시키는 내가 꽤나 웃겼던지 빵터져서 같이 껄껄 웃었다.
점심에 걸쳐 도착할 수 있는 곳은 Astroga라는 마을이었다. 늦게 출발한 만큼 오늘은 함께 점심을 먹지 못할 것 같았는데 나보다도 두 시간을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아직 그곳에 있었다. 맛집도 찾아놓고 말이다. 우리는 'Casa Maragata'로 갈 거라고 했다. 레온의 전통 음식인 'Maragato'식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마라가토 요리는 요리 하나의 이름이기보다는 하나의 음식 문화로 보는 것이 좋은데, 가장 큰 특징은 디저트부터 시작해 메인 요리로 끝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오는 음식 자체가 고기류로 가득하다. 초리조 같은 소시지부터, 스페인식 블랙 푸딩인 모르씨야, 소, 닭, 돼지고기까지 다양한 고기로 무게감 있게 구성되어 있다. 곁들여 먹을 채소로는 병아리콩이 대표적이며 감자, 당근 등이 함께 나온다. 제일 좋은 건 코스 자체에 와인이 포함되어 있어 마음껏 와인을 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끝없이 안주거리를 할만한 고기 요리가 나오고, 와인도 무한으로 마실 수 있는 무한 와인 고기 뷔페와 같은 곳이었다. 천국 그 자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기 행렬을 환영하며 와인을 연거푸 마셨다. 어쩜 무한으로 나오는 하우스 와인이 기름기 있는 육류 요리와 페어링이 이렇게 좋은지. 느끼할라치면 와인이 맛의 밸런스를 톡톡히 잡아주면서도 육향을 더 풍부하게 끌어내고 있었다. 음식과 와인이 너무 맛있어서 시간을 가지고 음미하는 것에 더불어 메뉴 자체의 양도 넉넉해 음식이 없어지는 속도가 더뎠다. 그러다 시간을 보니 벌써 여기 식당에 앉아있는지 2시간이 넘어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시간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낮에 먹은 술기운도 올라오고 이렇게 계속 와인을 마시며 앉아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서둘러 일어났을 테지만 엉덩이를 뭉개고 애써 시간을 못 본척했다. 그런데 오늘 걷기 싫은 건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모두가 자리에서 밍기적거리고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을 앉아있어서 이제는 일어나야 하나 고민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저쪽에 앉아있는 와인을 계속 시키는 테이블 하나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술집의 영업시간이 거의 끝났을 때, 아직 남아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과 묘한 연대감이 생기는 것처럼 그 테이블을 기준 삼아 눈치를 봤다.
화장실을 다녀오면서도 슬쩍 그 테이블을 봤는데 아는 얼굴이 있었다. 종종 만나 열심히 술을 같이 마시던 산티아고의 술친구, 아미꼬였다. 우리는 얼굴이 벌게진 채 반갑다고 얼싸안았다. 서로 근사한 점심을 한 덕에 얼굴도 벌게져 있었다. 여기 아스트로가는 초콜릿이 예로부터 유명하다며 초콜릿 박물관을 가자고 했다. 그렇게 갑자기 초콜릿 박물관을 갔다가 꽤나 넓은 박물관을 돌아보고는 알딸딸한 채로 아스트로가 마을을 쏘다녔다. 결국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더 이상 늦장을 부릴 수는 없어 걷기 시작했다. 오늘 안에 숙소에 도착할 수는 있을지 막막했다.
낮에는 행복했지만 이제는 생존이다. 깜깜한 밤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숙소로 걸어가야 했다. 술기운을 방패 삼아 파워워킹을 시작했는데, 아무리 몸의 온도를 높여도 비바람이 너무 춥게 들이쳤다. 이를 딱딱거릴 정도로 지나치게 추운 날씨였다. 바람이 앞에서 쳤다가 뒤에서 쳤다가 하염없이 몸을 때렸다. 등산화도 젖기 시작했다. 보통날에 비가 올 때는 등산화에 비가 묻는 정도였다면, 오늘은 아예 등산화가 폭삭 젖어버리는 비였다. 우비를 입고 있지만 이미 안팎으로 젖은 지 오래였다. 핸드폰을 꺼내서 위치를 확인하거나 대안을 찾을 겨를도 없었다.
등산화가 빗물을 머금으며 점점 무거워지니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가기 시작했다. 걸음도 불안정해지니 작은 자갈들도 하나씩 등산화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발아래로 자갈들이 굴러다니며 물집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느껴졌다. 끔찍했다. 만약 이 상황에서 혼자였으면 걸음이 느리게 처져버리거나 다시 아스트로가로 돌아가서 숙소를 찾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다섯 명이 모이니 오히려 힘이 되었다. 누군가가 처지면 응원을 해주고, 앞에서 바람을 막아주며 그렇게 으쌰으쌰 하면서 걸었다. 결국 깜깜해지기 전에 숙소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비를 쫄딱 맞고 생쥐꼴이 되어 나타난 우리를 보고 다들 놀랬다. 재차 우리 몸상태가 괜찮은지 물어봐주고, 등산화를 빠르게 말릴 수 있는 신문지도 주고, 젖은 물건들을 말릴 수 있는 곳도 알려주었다.
거의 납과 같이 무거워져 버린 등산화를 간신히 벗고, 물집이 터져 달라붙은 양말도 벗고 샤워실에 들어가니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다 풀려 피곤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일어설 힘이 생길 때까지 샤워부스에 기대 한참을 앉아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이 걸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혼자였다면 분명 몇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숙소에 도착했을 거다. 산티아고순례길을 걷기 전에는 막연히 혼자 걸으면서 온전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같이 걸으면서 느끼는 건, 더욱 즐겁게 걸을 수 있는 상황들과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 점점 소중해진다는 것이다. 오늘도 함께 걸어 즐거웠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음의 지지대가 되었다.
물론 우리가 끝까지 함께 걷지 않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다른 루트로 걸을 수도 있다.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게 여기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어느 것 하나 단정할 수는 없지만(내가 어떻게 걸을지 또한) 우선은 지금 같이 걸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