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32, 33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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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32, 33일 차
2018. 6. 14. 목요일 ~ 6. 15. 금요일
피니스테라(Finisterre) - 무씨아(Mux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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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대로 끝내지 않고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피니스테라(피스테라)까지 4일 더 걸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며칠 전 깨진 핸드폰 액정이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처음 떨어뜨렸을 때는 그래도 화면의 검은 부분이 많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화면의 3분의 1 정도를 채울 정도로 화면을 가리는 부분이 많아지고 있었다. 핸드폰이 아예 먹통이 될 수도 있어 무리해서 걷지 않기로 했다. 무씨아(묵시아)까지 버스로 이동하고 하룻밤 묵은 후에 피니스테라까지 걷는 한 구간만 더 걷기로 했다.
오전에 우철오빠, 웅민이와 작별하고 그다음에 내가 무씨아로 가는 버스를 탈 차례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누리는 자유에 행복했던 탓일까. 놀다가 무씨아로 가는 버스를 놓쳤다. 순례길을 더 걷기 위해서는 버스 편이 있는 피니스테라로 가거나 이대로 순례길을 끝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2일에서 3일 정도를 더 걸으려고 했던 계획이 하루로 줄어들었다. 위험할 수 있으니 빨리 순례길을 끝내려고 하늘이 돕는 걸까 생각했다. 그렇게 포르투갈로 가는 수지까지 배웅하고 버스를 타고 피니스테라로 향했다.
밤에는 잘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피니스테라 알베르게는 정말 사람이 없었다. 미국인 아저씨 하나와 나까지 딱 둘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종착지라 도착한 사람들은 다들 이곳에 머물지 않고 산티아고나 다른 도시로 이동하곤 한다. 어제 이곳에 도착했을 때도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를 떼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졸리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등산복이 스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곤 했지만 지나치게 고요한 이곳이라 그만 늦잠을 자버렸다. 채비를 하고 나니 여덟 시였다. 첫날과 비슷한 시간. 진정한 의미의 수미상관이었다. 얼렁뚱땅 마지막 순례길의 시작이었다.
오늘의 0.00km 비석이 있는 지점까지 걸어갔다가 무씨아까지 걸어갈 작정이었다. 비석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걸어도 걸어도 도통 목적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켠 구글맵에서는 비석까지 왕복하는데 6km, 무씨아까지 약 30km 걸린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다. 마지막 날에도 나는 36km를 걸어내야 하나보다. 언제나 그랬듯 어김없이 알베르게에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사람이 될 모양이었다.
비석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오르막길이 오지게 많았고 예쁘기도 오지게 예뻤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길은 초원과 내륙을 걸어내는 거라 바다를 볼 일이 없었는데 여기는 바다가 늘 옆에 있었다. 그래도 너무 힘들었다. 너무 숨이 차서 앉지도 못하고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옆에 가드레일에 'is this the real life'라고 쓰여있었다. 철학적인 의미겠지만 이걸 쓴 사람도 가쁜 숨을 쉬다가 매직으로 쓴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타이밍이었다. 오르다 멈추고, 오르다 멈추는 걸 반복했다. 그래도 좋은 건 힘들 때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해갈이 되었다는 거다.
드디어 언덕을 다 올라 0.00km 비석을 마주했다. 정말로 세상의 끝에 도착했다.
베르데 알베르게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걷는 이유는 죽음으로 향하기 위함이라고. 죽음에 도달하고 나서야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쪽으로 걷는 거라고. 그래서 예로부터 세상의 끝이라 여겨졌던 피니스테라에 도착하면 순례자들은 자신의 옷가지와 짐에 불을 붙여 태우곤 했다고 들었다. 요즘은 화재 위험 때문에 권장하지는 않는다고 해 라이터를 챙겨가지도 않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 거친 바닷바람이 온몸을 쓸어가듯 불기 시작했다. 씻기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를 태우지는 못하더라도 이 바람에 날려 보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여기에서 태워버려야 하는 것들을 생각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이젠 놓아야 한다. 다른 일을 선택해야만 하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부정적인 의문도 멈춰야 한다. 내가 나를 온전히 알고 있다는 기조도 버려야 한다. 이곳 피니스테라에서 순례자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나는 오늘 여기에 다다랐다. 응당히 나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마지막 종착지, 무씨아로 출발
같이 걷다 혼자 걸으니 무척 외롭다. 길에는 사람도 거의 없다. 대신 꽃길과 바다가 풀밭을 넘나드는 놀라운 풍경이 이어진다. 하늘은 쾌청하고 들꽃들이 색색들이 무리지은 들판 위로 새소리가 날아다닌다. 저 멀리서 파도가 부드럽게 밀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파란 바다가 있다. 소, 염소, 고양이, 강아지는 풀밭을 마음 놓고 걸어 다닌다. 유난히 경이로운 모습이 가득한 오늘이다. 은연중에 같이 감탄할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걷는 티가 이렇게 난다.
점심이 넘어가니 사람들을 조금씩 마주하기 시작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오늘 순례길을 마무리하는, 피니스테라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순례길을 걸어내는 사람들에게 ‘Buen Camino’라고 인사할 때마다 힘주어 마음을 담아보았다. 그들이 오늘의 길을 잘 마무리할 수를 있기를, 앞으로의 여정이 평탄하기만을 기원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이 실감 나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먹먹함에 크게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바를 들르는 것도 포기할 수 없다. 자주 마셨던 mahou 맥주를 발견해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는 맥주가 주는 나른함을 즐겼다. 더운 날 맥주를 마시고 걷다 보면 머리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느낌이 든다. 오늘도 그랬다. 아지랑이가 물결치듯 일렁이는 햇볕 안에서 걸었다. 신기루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해안 길을.
파도가 모래를 때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할 즈음 드디어 Muxia라고 적힌 표지판을 발견했다. 무씨아에 도착하자마자 한 건 쓰레기통을 찾아 등산스틱을 버리는 일이었다. 알베르게에서 누가 내 등산 스틱을 고장난 자기 것과 바꿔치기 한 후로 등산스틱은 내게 애증이었다. 없으면 안 되지만 잘못 땅을 찍게 된다면 그만한 타격감으로 내 팔꿈치를 괴롭히던 막대기라 매번 골치가 아팠다. 노란색 쓰레기통에 스틱을 버리자 개비스콘을 먹은 짤의 아저씨처럼 마음이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순례길이 끝이 났다.
오래 걸은 터라 쉬려 했지만 '무씨아 성당에서 보는 일몰을 잊지 못한다'는 리뷰에 뻐근한 다리를 이끌고 다시 언덕 트래킹을 시작했다. 사람을 한 명도 마주치지 못한 데다 돌담밖에 보이지 않아 속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불안한 마음으로 돌담 코너를 심드렁하게 돌았는데 그 순간 숨이 멎었다. 거대한 바다가 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내 바로 앞으로 커다란 태양이 떠있었다. 빛의 솜털이 보일 만큼 선명하고 열렬한 햇빛이었다. 성당의 종탑이 석양을 등지고 검은 실루엣으로 견고하게 솟아있었다.
사라져 가는 해가 하늘과 바다를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태양의 잔광이 수평선 위로 겹겹이 드리워졌다. 마치 공연의 막이 천천히 내려오듯 하루가 종료되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젠 정말 순례길도 끝났다는 것을.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온 날들이,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사랑과 정이 이 노을과 함께 마무리되고 있었다.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자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선이 선명해졌다. 내일부터는 더 이상 걸을 길이 없다. 대신 완전히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