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 시간이 주어지면 어떤 활동을 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성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나는 남는 시간이 있으면 비생산적인 활동보다는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자 하는 편이다.
시간을 밀도 있게 채우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애플리케이션과 수백 명의 전문가 중 내가 관심 있는 분야를 들을 수 있는 사이트 또한 정기 구독을 신청해 두었다. 매번 서점을 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전자책을 마음껏 볼 수 있는 플랫폼 또한 가입했다.
이처럼 나에게 비어 있는 시간은 생산적인 활동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능력을 갖추고 싶은 나의 마음이 잘 투영되어 있다.
줄곧 내가 하는 방식이 나에게 가장 맞다고 생각해 왔다. 책이나 강의를 통해 누군가의 값진 경험을 단 몇 시간 만에 엿볼 수 있는 것이 좋았고, 내가 부족한 점을 조금이나마 채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 좋았다.
내가 ‘생각해 왔다’고 기술한 것은 어느 순간부턴가 버려지는 시간에 대한 강박이 생기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거나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게 되면 그 시간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문제는 혼자 있을 때뿐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후로는 내게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자리는 조금씩 피하게 되었던 것 같다.
시간에 대한 강박은 나를 냉소적으로 만들었다. 일정한 루틴대로 움직여야 하며 조금이라도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하면 초조해졌다. 자연스레 나는 변수가 있는 활동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생산적인 시간에 대한 강박은 나에게 여유를 빼앗아 갔다. 빈틈없이 들어차 있는 출퇴근길의 지하철 같았다. 조금의 공간이라도 보이면 바로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들처럼, 일정이 생각했던 시간보다 빨리 끝나면 곧바로 다른 활동들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여유 없는 삶은 번아웃을 느끼기 쉬운 환경이 되었다.
한 번은 심한 몸살감기로 나흘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간 매일매일 해왔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침대에서 약만 먹으며 누워있었다. 몸이 어느 정도 낫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 하니 갑자기 너무나 버거운 느낌이 들었다.
매일 아무렇지 않게, 모든 시간을 빼곡하게 채우면서 해오던 활동들을 막상 다시 시작하려 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더라. 나는 지금껏 어떻게 이렇게 살아왔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나에게 번아웃이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다시 돌아가기에 앞서 지금껏 나의 생활 방식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여유가 없는 삶의 방식은 나를 예민하고 냉소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어떤 자리든 내가 생각해 둔 시간보다 긴 시간이 소요되면 초조해지고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살다가는 언젠가는 또 번아웃이 찾아오겠구나,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겠구나 생각했다.
여유를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바꾼 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였다. 매일 가던 운동을 주에 5회로 줄였다. 스케줄이 늦게 끝나더라도 잠을 줄여가며 운동을 하러 가곤 했었는데, 운동을 쉬는 날을 정해두니 훨씬 더 여유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나아가 휴식을 더 하는 대신 강도를 높이니 운동도 더 잘 됐다.
운동을 기점으로 매일매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강박에 가까운 활동들의 주기를 여유롭게 늘렸다.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뒤에는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어서도 변화가 찾아왔다.
직장인이 된 뒤에는 지인들과 만나는 주기가 상당히 길어졌기에 누군가를 만나는 시간만큼은 최대한 여유롭게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이라도 만나는 지금이 평소 내 시간만큼이나, 어쩌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마치 바쁨에 중독되어 있던 것처럼 살던 삶에서 조금은 여유를 되찾았다. 여전히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남아있지만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봄날의 벚꽃처럼 가끔은 시간을 어겨도 된다.
최인철, 아주 보통의 행복 중에서
날씨에 민감하여 매번 조금 다른 시기에 피는 벚꽃처럼, 모든 것이 생각한 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강박을 내려놓을 수 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