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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크 Oct 02. 2022

영국 페스티벌에서 기치료받은 썰 푼다

히피들의 천국, 그리고 천국의 에너지

원래 한국에서 봄, 여름, 가을 돈 모아서 뮤직 페스티벌 가거나 공연장 가는 게 가장 비싼 취미였던 나는 영국 유학을 가게 되면서 버킷리스트에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가기"를 넣어놨었다. 영국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은 세계에서 가장 큰 노천에서 벌어지는 음악 및 행위예술 축제이다. 영국의 서머싯 주에 위치한 워디 농장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은 1970년에 처음으로 개최된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2022년 관객의 수는 20만 명으로 집계된다).


글래스톤베리는 그냥 음악공연의 페스티벌이 아니다. 여러 장르에서 세계적인 가수가 와서 공연을 하기는 하지만 서커스, 전시회, 연극, 코미디, 춤 등 다양한 현대 예술의 공연과 워크숍도 함께 열린다. 어린아이들을 데려오는 부모들도 많아서 아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들이 마련되어 있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는 글래스톤베리를 다른 어떠한 페스티벌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곳으로 만든다.


영국의 국영방송은 BBC는 글래스톤베리가 개최되는 6월의 일주일간에는 글래스톤 베리의 가장 메인 스테이지인 피라미드 스테이지를 비롯한 주요 스테이지들의 공연을 생중계로 방송한다. 또한 아침 날씨 예보 방송에서는 글래스톤의 날씨를 매일 전해준다.


특히 글래스톤베리가 나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글래스톤 베리를 시작한 농장주 이비스 가문이 이 페스티벌로 나오는 수익금의 거의 대부분을 기부한다는 점이었다. 2016년에는 Water Aid, Greenpeace, Oxfarm 세 개의 구호 그리고 비영리 단체와 파트너십을 맺고 함께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그리고 페스티벌에서 나온 수익금은 저 3개의 단체에 기부되었다. 그래서 페스티벌을 운영하는 스태프 대부분은 자원봉사자들이며 기부단체와 긴밀하게 일을 한다.


하지만 빡빡한 학교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그리고 사실 몇백 파운드씩 하는 티켓 가격이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티켓팅이 엄청나게 어려웠다! 어영부영 티켓팅의 날짜를 놓치고, 나는 못가나 보다 하고 포기하고 있었다. 어차피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 열리는 6월 중순이면 졸업논문을 써야 한 시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학교 동아리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CND (일본인 학생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핵무기 군축 캠페인을 하는 동아리)에서 이메일 한통이 왔다. 이것도 재밌는 얘기인데, 학교에서 몇몇 사람들이 주최하던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Save Gangjeong 세미나에 갔다가 반전/ 반핵 운동 동아리인 CND를 만나게 되었고. 거기 동아리장이랑 서로 메일 주소 주고받고 행사가 있을 때 서로 한 번씩 참석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 친구인 노부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CND이 함께 활동하는 그룹인 South West Against Nuclear라는 단체에서 이번에 글래스톤베리에 캠페인 부스를 세우게 되었는데 거기서 일주일 동안 함께 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메일. 티켓 값과 캠핑 값, 그 이외 모든 비용이 무료이고 내가 해야 할 할 일은 7일 중 4박 5일 동안 캠페인 부스 차리고 열심히 반핵/반전 캠페인 하다가 오후 5시에 부스 접고 음악 공연을 보러 다니면 되던 것. '이건 나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메일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답장을 썼고 캠페인 담당자 전화번호를 받아서 그날 바로 전화 인터뷰(?)를 봤다.


예전에 다른 인권단체에서 캠페이너로 일했던 경험들도 있고, 여러 부스를 운영했던 경험들도 이야기하고. 지나가다 우연히 들렸던 반핵 환경단체에서 세미나 들었던 내용까지 끄집어내서 이야기했다. 나와 전화로 인터뷰를 보던 그룹의 리더인 니키는 걸걸한 목소리와 심한 잉글랜드 엑센트로 얘기했다.


“원더풀, 웰 컴투 더 팀. 베이비.”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서 반핵/반전 캠페인 부스를 운영하며, 친환경 캠핑을 하고 뮤즈와 콜드플레이, 아델의 무대를 보는 일? 내 인생 제일 쿨한 일 중 하나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페스티벌 뮤지션들 라인업 때문에 ‘와, 세상에 이런 거 가능?’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사실 농장에서 며칠 동안 16만 명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대안을 고민하면서 먹고 노래하고 즐긴다는 그 문화가 더 기억에 깊이 남는다. 화장실은 모두 푸세식, 그리고 탈곡된 겨 껍질을 이용해서 이루어졌고 그 화장실에서 나오는 바이오가스로 페스티벌 장소의 일부 전기를 충당했다.


글래스톤베리는 보통 100개의 넘는 무대와 500개가 넘는 음식 부스, 4000개가 넘는 화장실과 4만 개가 넘는 쓰레기통이 마련된다. 하나의 마을이 일주일간 축제를 위해서 세워진다. 워낙 넓은 곳인데, 내가 지내던 곳은 파마 컬처와 그린존이라고 그린그린 환경단체들과 반핵/ 대안생활 뭐 이런 단체들과 체험 부스가 모여있던 곳이었다. 글라스톤베리 온 부지가 비와 사람들의 흔적으로 머드 떡이 되어도 유일하게 푸르른 잔디를 볼 수 있던 우리 부스 앞 풍경.


글래스톤 심지어 축제 때 축제 운영 팀 안에 신문사도 차려진다. 그리고 매일 아침 글라스톤베리 신문을 발행한다. 그 당시 프로그램북에서는 올해 글래스톤베리에서 꼭 해야 할 30가지인가, 20가지가 실려있었는 데 그중 하나가 우리 캠페인 부스였을 정도로 우리 반핵/반전 부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허리가 많이 아팠다. 아픈지 한 2년 정도 되었을 때였나, 그냥 당연하게 너무 오래 책상에 앉아 있어서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퇴행성 디스크였다. 내 나이 20대 중반에 퇴행성 디스크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페스티벌에 가서 많이 걷고 많이 움직이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페스티벌로 향했다.


하지만, 페스티벌 장소는 밤마다 내리는 장대비에 잔디밭은 뻘처럼 변해있었다. 거기다가 들어가면 겨우 앉을 수 만 있는 높이의 1인용 텐트 맨바닥에서 자고 먹고 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허리 아펐다.   


우리 팀의 이름은 South West Against Nuclear a.k.a team SWAN 팀 스완이었다. 나는 우리 팀의 막내였다. 캠핑도 처음, 글래스톤베리도 처음, 영국 생활도 다 처음이던 나를 항상 챙겨주던 우리 팀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적게는 20살에서 많게는 40살까지 나이가 많았다! 그들을 보고 있자면 1980년대 히피들이 티브이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았달까. 걸걸한 목소리로 팀을 이끌던, 팀 리더 니키. 항상 나에게 ‘허니, 원 썸 티? 차 마실래?’라고 물어보던 전형적인 영국 남자, 니키의 남자 친구 브라이언. ‘진짜 이게 히피다’라는 40년 히피 내공이 느껴지던 로우랜드. 프랑스 반핵/환경 연구소에서 일하던 스티븐까지.


사실 처음 만났을 때는 모두가 나의 엄마 아빠뻘 나이여서 당황했다. 하지만 누가 영국 사람들이 차갑대. 진짜 너무 알뜰 살뜰 챙겨주던 우리 팀 크루들. 저녁에는 부스를 접고, 그 앞에 앉아서 함께 비건 요리를 해 먹고 와인 먹고 위스키 먹고 와인 먹고 위스키 먹고 위스키를 먹고, 바이올린 연주하고 노래 부르던 그 시간의 공기와 풍경을 잊지 못한다.


팀원이었던 하얀 머리 오벨라는 엄마 같이 매일 아침 이것저것 나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그리고 허리가 안 좋다니깐 매일 아침마다 자기가 하는 기체조를 시켜주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자, 오벨라는 나를 힐링 존이라는 곳에 있는 하얀색 큰 몽골 텐트로 데려갔다. 힐링 존이라는 이름의 걸맞게 자신의 오랜 친구가 하는 기치료/마사지 텐트라고 했다.


오벨라는 나를 친구에 세 소개해주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떠나버렸다. 전형적인 영국 할머니 같던 엘리. 엘리는 나의 손목을 잡고 나의 맥박을 체크했다. 그리고는 나를 마사지 침대에 눕혀서 이곳저곳을 손바닥으로 지긋이 누르기 시작했다.


‘지금 에너지가 아주 약하구나, 아가.’


‘몸의 왼쪽과 오른쪽의 에너지의 균형이 맞지 않는단다’


나긋나긋한 엘리의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 스스로 눈이 떠졌다.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니 텐트 한 구석에서 엘리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일어났구나? 아마 잠깐 추운 느낌이 들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 걱정하지 마렴.’

마음을 다해 주었던 그 마사지 같은 기치료를 받고 나의 허리 통증이 감쪽같이 나아졌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은, 사실 별 다른 차도는 없었다. 일주일 내내 나는 허리를 부여잡고 엉거주춤 페스티벌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허리에 4개의 나사를 박는 큰 수술을 받았어야 했다. 몰라서 용감할 수 있었달까.


우리 캠페인 부스와 텐트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은 언덕 위를 20분 정도 올라가야 나왔다. 아침 일찍,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미리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언덕을 낑낑거리고 올라가다 보면 밤새 시끄러웠던 음악소리가 다 꺼지고 고요한 캠핑촌 위로는 동이 터 올랐다. 마법 같던 시간. 그 이후로 나의 로망은 ‘신혼여행으로 글래스톤베리 가기’이다. 물론 건강한 허리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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