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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작가 Oct 12. 2020

나의 심리상담 도전기_(1)

내 안의 감정 표현하기

나는 항상 닫힌 문을 열기 전에 조금 긴장하는 편이다. 아마 문 안쪽의 상황이 예측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예측되지 않는다는 건 날 항상 불안하게 만드니까. 특히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기 직전이라면 더욱 불안해진다. 상담 첫날 나는, '상담실 문이 반대편이 보이는 유리문이라면 조금은 덜 긴장할 수 있을 텐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며 학생회관 건물로 들어갔다. 나의 바람만으로 목재로 만들어진 문이 유리문으로 바뀔리는 없었다. 이런 나의 디테일하고 세심하기까지 한, 다소 쓸데없어 보이기도 하는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날 상담실의 문은 다행히도 미리 활짝 열려있었다.


걱정의 95%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라는 증거자료 하나를 수집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문이 미리 열려있던 덕분에 긴장할 새도 없이 상담사님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로 마주 보게 되었다. 나는 쭈뼛쭈뼛 상담실 안으로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상담받으러 온 학생인데요.' 하고 짧은 인사를 건넸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약간의 두근거림과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내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상담사님은 남자분이셨고 알고 보니 교수님이셨다. 교수직과 상담직을 겸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그분을 '교수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교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매우 차분하신 스타일이었다. 질문을 하신 뒤에는 주로 들어주는 포지션을 취하셨는데 잠시 정적이 흘러도 내가 말을 이어나갈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덕분에 나는 빠르게 의견을 전달해야 한다는, 대화가 끊기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는 늘 조급하게 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첫 상담에 대한 나의 기억>

기다림이란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어떤 대화에서는 침묵조차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처음 서너 번의 상담에서는 '언제 불안을 느끼는지'와 '그때 나타나는 신체 증상', '자라왔던 성장 환경', '부모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에서도 초반에 집중되었던 상담 내용은 '성장환경'과 '부모님과의 관계'였다. 특히 교수님께서는 과거를 떠올리면 내 안에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지,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하셨는데 나는 최선껏 과거를 떠올리며 나의 감정을 드러내는 답변을 했는데도 교수님은 '그건 감정이 아니라 사실이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에 약간 당황했다. '정말 그런가?' 그 순간 나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방금 전에 내가 했던 답변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방금 전의 나는 주로 '그때 좀... 힘들었어요.', '그냥 좀... 답답했어요.'와 같은 말들을 사용하며 대답하고 있었는데 교수님 말씀대로라면 그건 있는 그대로의 감정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실은 과거를 떠올릴 때 화도 나고, 밉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슬프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하고, 열 받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그 단어들을 내 마음속에만 간직한 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마치 금기의 단어인 것처럼, 마음 한 구석에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층층이 쌓아둔 것이었다. 그것은 일방향적인 축적, 들어가 쌓이는 것은 있어도 밖으로 나오는 것은 없는, 부정적 감정들의 수용소였던 셈이었다.


때문에 나는 거의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상담실에 들어가면 나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연습을 했던 것 같다. 그때의 감정을 최대한 되살릴 수 있는, 내가 알고 있는 최적의 단어로 그때의 감정을 표현해보는 연습이었다. 마치 부정적 감정들의 해방운동을 하는 기분이었다. 감정의 수용소에 갇힌 수감자들을 언어에 담아 공중으로 휘휘 날려버리며 석방시켜주는 기분이었달까.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마치 죽어있던 감정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과 같았다. 어떤 기운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쓰이지 못한다면 결국 나를 괴롭히는 불안이라는 실체로 드러나고 만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나는 상담을 통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감정 표현하기 기술을 다시 되찾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당시에 '내가 지금 감정 표현하기 연습을 하고 있구나.' 하고 바로 알아챈 건 아니었다. 교수님께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상담의 흐름을 유도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의 감정 표현하기 훈련'에 돌입하게 된 것이었다.






감정 표현하기 훈련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살아나는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 억눌려 있던 감정들. 타인의 눈치 때문에, 좋은 아들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내가 믿고 있는 종교 때문에 표현하지 못했던 여러 감정들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마다 그 감정들을 전부 표현하고 산다면 인간관계가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에겐 그러한 창구가 없었고, 때문에 내 안에 감정들이 켜켜이 쌓였던 것이다. 상담 이전의 나는 그간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상담을 통해 작게나마 감정의 해방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상담에서 감정 표현하기 훈련만 했던 것은 아니고 여기서 다 말할 수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하며 상담이 진행됐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면 초반의 상담 내용의 핵심은 '감정 표현'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아무래도 인간에게 있어서 감정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지만 감정을 가진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것은 아직 어려운 과제라고 한다. 감정을 가진 것처럼 흉내 낼 수 있을 뿐, 로봇이 감정을 갖도록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감정이라는 것은 자신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 깊은 심해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복잡하고도 신비로운 영역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신비로운 영역을 일정 부분 드러내야 마음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신비로움을 감출 수 없을 만큼 반짝반짝 빛이 나는 감정들을 억지로 덮어버린다면 그 안의 갇힌 빛 에너지는 결국 모여서 언젠가 폭발해 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글로 풀어놓고 보니 내가 상담에 돌입하자마자 나의 감정들을 술술 표출한 것처럼 보일까 봐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현실은 아주 더디게, 아주 천천히 나아졌는데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시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듯, 어느 시기가 지나기까지는 나도 감정표현을 하는 것에 서툴렀다. 그래서 다음 편에서는 '감정표현 훈련을 하면서 내가 난관에 부딪혔던 것들', '그때 했던 생각들'과 '지금 그때를 바라보며 느끼는 것들'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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