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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작가 Nov 01. 2020

나의 심리상담 도전기_(4)

집단 상담(group counseling)


그날은 무척 추운 날이었다. 눈까지 내렸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왠지 눈이 내렸을 것만 같은 날이었다. 특별한 날을 더 아름답게 회상하기 위해 내 뇌가 저지른 일종의 조작된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사실 나의 뇌까지 끌어들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날이 내게 조금은 특별했던 날이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날은 집단상담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나는 학생회관 상담실에 도착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고 교수님만 먼저 와 계셨다. 긴장한 탓에 내가 너무 일찍 도착했었나 보다. 교수님께서는 내게 차 한잔 하면서 잠깐 소파에 앉아 기다리라고 하셨다. 나는 소파의 아늑함과 기다림의 긴장감 사이에서 차의 향기와 온기를 느끼며 약간은 들뜬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올까? 집단상담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자기소개를 시키면 뭐라고 해야 하지? 1대 1로 상담받듯이 다수에게 모든 것을 다 오픈하기는 부담스러운데. 어디까지 말해야 하고 어디부터는 숨겨야 할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나의 시선은 의미 없이 벽에 걸린 시계와 손 안의 스마트폰을 번갈아 향했다.


잠시 뒤 두 번째로 도착한 참가자가 들어왔고 그분은 나와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뒤 나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무척 어색했다. 어색함을 깨고 교수님께서 바로 무언가를 말씀하셔서 다행이었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방 안 공기의 질량이 순간 2배쯤 무거워질 뻔했다. 교수님께서는 다른 학우들은 조금 늦을 것 같다며 일단 그때까지 셋이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셨다. 그 순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좀 늦게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갑자기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한 명씩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 수가 늘어날수록 난이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지금 막 게임을 시작한 '스테이지 1'에 있는 것이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분과 서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주고받았다. 학과, 학번, 나이, 이름 정도의 정보를 주고받았던 것 같다. 그분 역시 나와 같은 교수님께 상담을 받는 대학생이었다. 무엇 때문에 상담을 받는지는 차차 알게 될 것 같아서 따로 묻지도, 먼저 말하지도 않았지만 사실 궁금했다. 하지만 때론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을 조심성'과 '궁금증을 조금은 미뤄둘 참을성'도 필요한 것이었다.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다면 더욱 그래야 했다. 셋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다른 분들도 하나, 둘씩 상담실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우리는 조금 더 큰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첫날 집단상담의 참가자는 총 4명이었다. 교수님까지 총 5명. 나중에는 남녀 커플이 참여해 참가자가 6명이 되긴 했지만 첫날에는 참가자 4명으로 시작했다. 이 날이 내게 특별했던 이유는 내가 처음으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나의 불안을 털어놓은 날이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4명의 사람들에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은밀하면서도 한편으론 공개적이었기에 특별했다. 사실 2명 이상만 되어도 '다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그동안 상담사님께 1대 1로 털어놓았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단수'에게 말해왔던 것이다.


이 '단수'가 '다수'가 되는 순간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내겐 큰 의미가 있었다. 나의 불안을 다수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평소에, 나의 불안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아마 그 사람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참가자분은 자신의 불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분은 불안 때문에 상담을 받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에게도 자신만의 불안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대화들이 가치 있었던 이유는 평소 일상생활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대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의 기억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나누고 싶었던 주제의 대화였지만 어느 곳에도 쉽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수용하는 방식의 소통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문제점을 타인에게 드러내어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안정감과 수용감, 그리고 약간의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원형으로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눴던 그 시공간에선 대화를 넘어선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방식의 소통이기도 했다. 때문에 나는 그날을 단순히 추운 겨울의 계절 중 어느 하루로 기억하지 않고 눈이 내렸던 특별한 겨울 날로 치환하여 그날을 왜곡하여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진실이 무엇이든 내가 나의 치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털어놓았을 때 다수에게 수용받았던 그날은 내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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