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작가 Apr 05. 2021

디랙의 바다


이것은 '아무 것도 없음'이라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흔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진공상태라고 부른다.

그런데 진공이란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일까? 


이것에 의문을 품은 '디랙'이라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디랙방정식'으로부터 해 하나를 얻게 되는데 그것은 음(-)의 에너지를 가진 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에너지가 마이너스인 전자라니, 다른 과학자였으면 그 결과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방정식으로부터 얻은 결론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오히려 '어쩌면 정말로 음의 에너지를 가진 전자가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고심 끝에 디랙은 음의 에너지를 가진 전자가 본래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라는 창의적인 생각을 한다. 당시에 이 말을 들은 사람이라면(아니,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넓고 넓은 이 우주가 진공 상태에서도 음의 에너지로 가득한 전자의 바다에 뒤덮여있다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보이지도 않는 것을 증명할 방법은 있고?'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디랙은 그러한 의심 속에서도 계속해서 논리를 전개해나간다. 


다음은 디랙의 생각이다. 


'만약 진공상태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음의 에너지를 가진 전자의 바다라면, 진공상태에 빛을 쪼였을 때 디랙의 바다에서 전자 하나가 빠져나와 양의 에너지를 갖는 전자로 나타나지 않을까?'


그렇다면 디랙의 바다에서 빠져나온 전자가 있던 그 자리에 구멍 하나가 생길 것이고 음(-)전하를 띤 입자가 튀어나갔으니 그 구멍은 양(+)전하를 띤 전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 구멍을 양전자라고 부르기로 한다. 


아니, 잠깐만. 아무것도 없는 구멍인데 이름을 붙인다고? 이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표기하기 위해 0이라는 숫자를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이다. 비어버린 구멍이라는 것이 어떠한 물질, 입자가 될 수 있음은 이상하면서도 기묘한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비어버린 구멍이 양전하를 띤다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이 맞을까? 무언가가 나타나는데도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러한 디랙의 바다라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된 양전자라는 물질은 이론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 1932년 앤더슨에 의해 실험적으로 검출된다. 양전자의 발견 이후 반물질이라는 것은 우주에 실재하는 것임이 확인되었고 이후 양전자는 물리학 뿐만 아니라 의학에서도 활용되게 된다. 


대형병원에 가면 흔히 PET 촬영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양전자를 방출하는 기계라고 한다. 우리 몸의 전자와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양전자가 만나 쌍소멸을 하면서 빛을 방출하게 되는데 그 빛을 통해 우리 몸을 관찰하게 되는 방식이다. PET 촬영을 할 때 디랙의 존재를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과학자 뿐만 아니라 과거의 많은 사람들에게 빚지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보자.

진공이란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일까?

아니다.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건 없다.

우리는 음의 에너지로 가득한 '디랙의 바다'에 뒤덮여 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존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