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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kim Jul 19. 2024

100만 원보다 비싼 고민

부동산 가계약금을 투자해 봤어요.

북촌

어느 동네에서 살고 싶냐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답할 수 있다. "서촌이요". 바로 옆 경복궁은 하염없이 달리기 좋다. 건너편 서울 시립 미술관은 영감으로 충만하다. 등 뒤에 있는 인왕산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언제든 올라오라 한다. 골목 어귀에는 사연 깊은 가게가 자리하고 주민들은 차분하게 걷는다. 서촌은 내 취향과 기질을 공감해 주는 장소이다.


안타까운 건 나만 서촌의 매력을 알아본 게 아니라는 것. "좋은 매물 있으면 알려주세요. 바로 올라게요" 광주에서 수시로 올라오면서 매번 매물을 놓치는 모습은 안쓰러웠을 테다. 중개사 아주머니는 총각에게 제일 먼저 보여준다며 사진을 보내줬다. 북촌 한옥 마을 언덕에 걸쳐있는 방이었다. 부엌 창에는 청와대가 걸려있다. 서촌 어느 방보다 경복궁과 미술관에 더 가까웠다. 인왕산과 멀어졌지만, 북악산을 알아갈 수 있는 거리였다. 고민 없이 가계약했다.


집주인은 휴가 중이라며 돌아와서 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가계약으로부터 3주 뒤였고 내일이다.



'누리고 살아'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했던 확신에 틈이 생긴다. 잡념이 스며들고 결정을 의심하고 번복하라고 채근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넘치는 시간이 원인이 아니었다. 북촌 갈 거라는 선언에 누리고 사라는 형의 조언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누리고 살라는 조언을 싫어한다. 나는 내 삶을 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고민하는지도 모른 채로 고민한다. 허송세월 보낸 후회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 같다는 걱정은 새벽 2시에 나를 깨웠다. 졸음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쇼츠에 정신을 팔아넘겼는데, 아마 그 시간을 숙면한 시간보다 길었을 테다. 개운할 수 없는 아침, 카페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머지 시간은 저녁 침대에 누울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내며 허비한다. 온종일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몬순은 피해야 할 시기이지 누릴 시간은 아니다.


건강하고 여유 자금이 있겠다. 부인과 아이도 없겠다. 그래서 좋은 때란다. 내게 조언을 하고 회상에 잠긴 상대를 보면 확신한다. '게으른 조언이다'.


형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말했다. "누리고 살아라". 그런데 가슴에 안착했다.



허비

광주에 내려온 지 3년이 지났다. 작년부터 업무에 손을 떼고 사무실 뒷방 늙은이를 자처하고 있다. 뭘 할지 찾아보겠다고 양해를 구한 몇 달은 일 년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알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사무실로 출근했고 주말에도 자리를 지켰다. 무언가 항상 하고 있었고 바쁘다는 말로 많은 걸 거절했다. 그런데 그간 무엇을 했냐고 묻는다면, "모르겠어". 불안감과 조바심을 느낄 겨를이 없이 사는 게 목적이었다.


대개 한 해가 지나서야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부랴부랴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물론 실천은 하지 않는다. 이런 패턴은 매년 반복되고 벌써 세 번째이다. 자책은 더 이상 일 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불현듯 익숙함이 느껴질 때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신호를 예상하고 차선을 넘나드는 구간, 카페 점원과 거리낌 없이 나누는 대화, 직원들에게 건네는 상투적인 아침과 저녁 인사.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이토록 능숙한가. 편안한 장소와 상황, 그리고 사람은 도리어 내 어리석음 상기시킨다.


동명동 스타벅스와 ACC를 더 이상 가지 않는다. 내추럴 카페 스툴도, 사무실도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 새로운 곳으로. 이왕이면 북촌으로.



대화

“가서 뭐 할 건데?”

“퍼스널 브랜딩하고 작업실 구해서 실크 스크린도 해보고...”

“왜 하필 북촌인데?”

“취향에 잘 맞는 동네인 것 같아서요”

"그런데 북촌에서도 반복되지 않을까?"

‘...’



'제대로 고민해 봐'

형은 누리고 살라며 대화를 갈무리했다. 내 삶을 지난 3년 동안 면밀하게 관찰했던 사람이라 부러움이나 형식적인 응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형은 내가 놓은 상황을 들려줬다. 어디에 속해있지 않고, 여유 자금이 있고, 건강하고, 혼자 지내고, 작은 수입원이 있고, 아직 30대고.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라고 했다.


“북촌을 그렇게 가고 싶다면 한달살이를 해봐. 아니면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이곳저곳 한 달씩 살아보던가”

“네가 생각하는 것들을 경험해 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불현듯 결혼하게 될 거야”

“책임을 지려면 자유를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해”

“그래서 그전에 네 생각들을 치열하게 검증해 보는 게 좋아”


대화의 파편은 하나 같이 가슴에 꽂혔다.

고민하는 건 좋다고 했다. 그런데 잘해야 된다고. 그러니 누려보라고 제안했다.


나는 표현하는 삶을 살면서 세상에 기여하고 싶다. 추상적이기보다 포괄적인 방향이다. 그래서 검증해 보고 싶은데 수두룩하다. 어쩌면 무엇을 하고 살지 몰라서 고민이라기보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민하는 걸 수 있다. 형은 내 욕구를 파악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실천해 보란다.



100만 원짜리 고민

계약을 취소했다.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워낙 나를 좋게 보던 분이라 걱정하며 무슨 일이라고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라며 북촌으로 이사 가는 게 성급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아주머니는 한참 동안 듣다 가계약금 날리는 게 안타깝다며 주인과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다.


가계약금의 행방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개의치 않다.


"네 고민이 100만 원보다 못 한 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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