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들어오는 작은애의 몸에서 서늘하고 눅눅한 나무냄새가 난다.
지구과학이 전공인 작은애는 지층을 탐사하고 암석을 조사하러 산으로 들로 야외실습을 간다. 모자도 벗지 않은 채로 커다란 배낭을 내려놓더니 부스럭거리며 그 안에서 대봉 한 개를 꺼내놓았다.
남쪽지방 산기슭에서 수백 킬로를 달려온 대봉 한 개가 식탁위에 놓였다. 고고해 보이는 폼이 예사로운 감이 아니다. 태어난 나무에서 독립하고 낯선 곳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인데도 사뭇 당당해 보인다. 코끝을 세우고 도도한 모습으로 식탁위의 대봉은 크기를 자랑하며 고개를 들고 자기가 서 있는 곳을 둘러보는 듯 보인다. 대봉 하나에 마음을 빼앗겨 눈을 떼지 못했다. 아마 아이도 이 대봉을 처음 보았을 때 눈을 사로잡는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집에까지 갖고 왔나보다.
우리 아이들도 낯선 곳에 홀로 처해졌을 때 이런 용기와 당당함을 가질 수 있을까. 커다랗게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본다. 타원형의 주홍빛 반짝임은 가슴가운데 하트를 새기듯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봉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작은애는 말했다. 암석 탐사 중에 옆쪽에서 툭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수북한 나뭇잎 더미 위로 커다란 감 한 개가 떨어지더란다. 호기심에 주웠는데 너무나 크고 예뻐서 보여주고 싶어 갖고 왔단다. 윤이 잘잘 흐르고 돌 같은 단단함이 꽤나 떪은 맛을 지녔을 거라 보인다. 이렇게 크니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 어릴 적 경북 감포에서 삼년을 산 적이 있다. 그곳은 어디나 감나무가 울타리 안팎으로 뻗어있고 여름부터 감들은 영글어갔다. 쌀쌀한 늦가을이 되면 남아있는 감들이 사방에 널렸고 아저씨들이 자루채로 헐값에 땡감을 팔았다. 집집마다 한 자루 이상씩 사서 밤새 깎는다. 그 때는 거실에 라디에이터가 있었다. 그 위에 달력을 깔고 말리면서 하루에 한 번씩 주물러 주면 단단함이 사그라진다. 곶감이 되기 전 말랑거릴 때가 가장 맛있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가 눈비비면서 나와서는 제일 먼저 한 개 집어 먹었다. 심심하면 먹는 아이의 간식이었다.
그 생각이 나기에 한 개의 대봉을 깎았다. 그냥 햇빛에 두면 홍시가 되겠지만 곶감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깎은 껍질 속을 혀로 맛보니 떫음이 엄청 강하다. 혀를 살짝 댔는데도 입 안 가득 묻어난다. 껍질을 잃은 대봉이 얌전해 보인다. 고운 자태의 양귀비가 겉옷을 벗은 모습이다. 작은 접시에 담아서 식탁위에 놓았는데 묘한 흥분과 함께 오랜만의 호기심에 나의 눈이 반짝거린다. 발가벗은 대봉을 요리조리 바라보면서 영화 〈중경삼림〉의 양조위처럼 말을 걸었다.
“네 고향은 어디니? 참으로 곱구나. 어머니나무가 어떠했기에 이리도 아름다운거니.”
태어나고 자란 곳이 얼마나 산 좋고 물 맑았기에 이리도 실하게 컸냐고 치켜세우며 우리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낮에는 해가 주방까지 제법 들어오기에 창문을 열어서 바람도 들어오게 했더니 대봉은 하루 만에 짙은 색을 토해낸다. 며칠 지난 후에 보니 겉이 살짝 말라보였다. 속의 단단함을 달래기 위해서 주물러주었다. 그 다음날은 벌써 말랑거린다. 도시 아파트의 온도와 분위기에 금방 자신을 누그러뜨리는 대봉이 변신을 꿈꾼다. 하나의 자신을 버리면 또 하나의 내가 그 안에서 싹튼다. 진한 핏덩이와도 같이 업그레이드된 자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언제나 그것을 꿈꾸는가보다. 대봉 한 개가 내 꿈을 깨우며 꿈틀거리게 한다.
어느 날 가족들이 저녁을 일찍 먹고 쉬는 자리에서 곶감이 덜 된 대봉을 사등분했다. 작은애가 경상도에서 갖고 온 대봉이 얼마나 맛있어졌는지 맛을 보자고 한 조각씩 건넸더니 모두가 놀란다. 단맛이 기가 막히고 말랑함이 있는 그 맛에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음미하면서 먹는다. 오랜만에 느끼는 운치였다.
‘아, 이런 거구나!’하면서 모두들 재미있어했다. 마카롱보다 백배 낫다고 한마디씩 했다.
그리운 옛날 보따리를 풀어서 곱씹어보는 맛이 아련해서 목이 멘다. 대봉 한 개가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살았던 기억을 깨우고는 사라졌다. 존귀한 보물을 꺼내 품에 안았는데 허전함에 마음이 일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