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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늘보 Apr 27. 2021

일희일비하며 살기

라디오스타 하니의 인터뷰를 보고 바뀐 살아가기에 대한 생각

감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필요하다. 내 몸이 스스로 바이러스에 저항할 수 있도록 면역력을 기르는 것. 혹은 병균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몸에 백신을 주입하는 것.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인류 또한 상처를 덜 받으며 살기 위해 두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 면역력이 자기 성숙이라면, 백신은 방어기제다. 이를테면, 성숙은 나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 또한 소중히 여겨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면역력 같은 태도이고, 방어기제는 덜 아프기 위해 인공적으로 균을 몸에 넣는 백신과 같다.


특정 상황이 펼쳐졌을 때 내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를 살펴보자. 일단 면역이나 백신이 필요한 상황은 대체로  좋은 상황일 텐데,  무의식 속에서 떠오른 말이나 행동이 내면의 성숙함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방어기제로 나오는 반응인지 구분하긴 어렵다. 인간의 감정은 과학과 달라 아다리가 맞아떨어지지 않고,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 마냥 머릿속에 쏙쏙 박히지 않은  흘러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숙 안에 방어기제가 포함되거나  반대가 성립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모유수유가 끝나고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미용실에 가는 것이었다. 의학적으로 모유수유 중에도 파마나 염색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한 번 파마를 시작하면 4시간은 기본이라 모유수유하는 애엄마가 4시간 이상 집을 비우기 힘들어 미용실에 가지 못했다. 단유를 하고 이젠 나도 푸석한 머리카락이 아니라 헤어스타일을 가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설렜다.


임신기간부터 미용실을 못 갔으니 머릿결이 많이 상했다며 미용실 원장님은 단발을 권했다. 나는 대체로 전문가 의견을 잘 따르는 편이라 ‘알아서 예쁘게 해 주세요’란 말만 하고, 오랜만의 휴식을 누렸다. 미용실에서 서비스로 주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좋고, 머리를 감기면서 해주는 두피 마사지도 좋았다. 무엇보다 미용실의 몇 시간 동안 실컷 핸드폰을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의 호사에 정신이 팔려서였을까. 내 머리가 점점 버섯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 스타일은 길이를 더 잘라야 예쁜 머린데, 아기 때문에 묶을 수 있는 길이여야 된다고 하셔서…”


원장님도 망한 머리라고 느꼈나 보다. 근데 길이가 뭐가 중요하죠. 새송이나 양송이나 다 똑같은 버섯 아닌가… 아무튼 그런 궁금증만 갖고 집에 오니 처음 4시간 넘게 아이를 보던 남편이 나를 반겼다.


“우와~ 엄마가 머리에 버섯을 쓰고 왔네~?”


이보세요… 댁도 박새로이 머리하고 나타났을 때 성냥개비에 초콜릿을 묻히고 온 거 같았거든요. 임신 9개월, 모유수유 6개월 동안 너절한 머리카락을 쓰고 살았는데, 15개월 만에 얻은 결과물이 버섯순이라니. 조금 빡치긴 했지만, 이내 생각했다. 머리야 어차피 금방 길 텐데, 열 받을게 뭐 있나. 버섯머리라고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나는 웬만한 일들에는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뭐 어때’하며 열 받지도, 슬퍼하지 않으며 넘긴다. 박완서 작가님 말씀처럼, ‘나는 왜 사소한 일에만 흥분하는가.’ 흥분은 물론 큰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을 성숙의 미덕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라디오스타에 나온 하니의 인터뷰를 보며 생각을 바꿨다. 하니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가끔 그녀가 하는 말들이 기사화된 것을 보면 속이 깊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임을 느끼곤 했다. 이번에는 역주행 신화를 쓴 브레이브 걸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보다 먼저 유튜브 역주행으로 인기를 끈 당사자로서 ‘일희일비하라’는 조언을 했다. 본인은 인기를 얻었을 때 내 것이 아닌 선물을 받은 것처럼 느껴 다시 누군가 선물을 가져가 버릴 것처럼 살았던 게 아쉽다는 것이다.

출처: MBC라디오스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깊이 공감했다.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말은 대체 왜 나온 걸까. 아마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성숙한 태도이기 때문일 거다. 나 또한 그랬다. 너무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늘 평정심을 유지하다 보니 크게 상처 받을 일도 없지만, 크게 좋아서 날뛰었던 기억도 없다.


어쩌면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상처 받기 싫어. 지금 좋았다가 곧 내리막길로 곤두박질 칠 기분을 느끼면 박탈감이 더 크잖아. 그냥 덜 좋아하고 덜 실망할래”를 힐링 에세이 식으로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실망하는 것이 두려워”라고 말하면 어리숙해 보일까 봐 그 마음을 조금 어른스럽고 철학적으로 표현한 말일 거다. 인생에 달관한 듯, 성숙한 태도인 듯 보이지만 실은 달콤한 사탕을 손에 쥐고도 언젠가 누군가 와서 가져가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먹지도 못하고 놓지도 못하고 달달한 냄새만 맡으며 침 흘리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사실 진짜 성숙이란 마음껏 일희일비해도 괜찮은 마음가짐일지도 모른다. 일희일비하며 인생의 좋은 이야기와 슬픈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는 것. 손에 쥔 사탕을 누가 가져가 버려 사라지는 것도, 내가 먹어버려 사라지는 것도 어차피 사라지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 그럴 바엔 잠깐이나마 달콤함을 느끼며 황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인생의 기쁜 기억을 하나 더 얹어가는 방법일 게다. 슬픔 또한 마찬가지다. 화나고 슬플 때마다 그 감정을 오롯이 느끼면 감정이 소모되고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늘 마음 곁에 단단한 성벽을 세워두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늘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만 유지하다 보니 누군가를 따듯하게 데워주지도 못하면서 갈증을 해소해주는 청량감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다.

‘어차피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하며 좋고 싫음도 없이 지내오던 날들.

“어차피 죽고 살지 않는 거, 좀 볼썽사나울 뿐, 마음껏 일희일비하며 살아봐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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