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vs. 알고리즘
날이 쌀쌀해 지니까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29CM 앱을 켠다. 원피스? 청바지? 니트? 카테고리별로 쭉 보다가 마음에 드는게 없는 것 같으니 무신사 앱을 켰다. 핸드폰에 설치 되어 있는 패션 플랫폼 앱만 10개가 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다음날 또 W컨셉에 들어가봤다. 최근 몇 년간 나의 쇼핑 패턴은 이랬다. 좋아하는 패션 플랫폼에서 제품의 대분류 카테고리 (자켓, 상의, 스커트 등)로 검색해서 나오는 결과에 따라 쇼핑하는 것. 이런 소비 패턴이 내 취향을 좀먹는지도 모르고.
다 거기서 거기
지그재그, 에이블리, 브랜디... 그들의 시작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에이블리는 블로그 마켓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았고 현금 결제만 가능하던 그들에게 카드결제나 휴대폰 결제와 같은 편리함을 부여했다. 지그재그는 수없이 많은 온라인 쇼핑몰(소위 동대문 쇼핑몰)을 한 곳에 모아놓았고, 29CM는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무신사는 무진장 신발 사진을 많이 모아놓은 곳 이었다. 그러나 이 들이 현재는 모두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는 물론이고 해외 컨템포러리 브랜드, 하이앤드 명품, 주얼리, 동대문 쇼핑몰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입점시킨다. 소비자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관심이 있을만한 것을 몽땅 모아두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여기서만 살 수 있는 제품"이란게 사라져버렸다. '브랜딩'이라는 허울로 좋게 포장은 되어있지만 여기 있는 옷은 저기도 있고, 여기서 세일할 떄 저기서도 세일을 한다. 소비자는 '어디서 최저가로 살 수 있는지'를 바쁘게 비교해야한다.
취향을 잃어가는 과정
신발이 필요하면 동대문 신발 상가에 가서 신발을 샀고, 매고다니던 지브라 무늬 가방은 일본 (일명 니뽄삘) 옷을 판매하던 가게에서 공수했고, 이대 앞 구제가게에서 디깅을 하며 1시간동안 겨우 맨투맨하나를 골라도 그게 재미있었다. 그런 나의 취향을 친구들은 늘 동경해주었다. 도매시장에서 사온 신발을 자기한테도 팔아달라고 했고, 급기야 내 패션을 그대로 따라하던 친구도 생겼다. 대학생때까지만 해도 친구들이 "나 어제 명동갔는데, 거기 완전 네 옷 있더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내 옷' 그들이 보는, 내가 가지고 있는 취향이었다. 100명, 1000명 사이에 서 있어도 나는 취향이 튀는 편이었다.
10학번인 나는 고등학생때부터 G마켓, 11번가, 옥션에서 옷을 샀고 스타일난다, 겐지샵에서 쇼핑을 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온라인 커머스가 활발해지면서 오프라인에서 옷 사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고 좋아하는 온라인 쇼핑몰을 특정해서 거기서만 옷을 샀었다. 여기서 파는 옷이 저기서도 파는 '도매스틱 브랜드'에 눈을 뜨면서 부터 같은 옷을 더 저렴하게 파는 곳을 '손품 팔아'가면서 찾았다. A4용지에 사고 싶은 옷과 판매하는 사이트를 적고 얼마인지, 할인은 얼마나 하는지 적으면서 비교해가며 구매했던 나는 스스로를 '스마트 컨슈머'라고 말할 정도로 나의 취향을 위한 작업(?)들을 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29CM와 W컨셉을 알게 돼면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이 한 사이트에 모여있고, 좋아하는 옷을 장바구니에 담기만 하면 손으로 적을 필요 없이 한 페이지에서 어떤 옷을 얼마에 구매할 수 있는지 비교도 가능한 신세계를 경험하면서 쇼핑 패턴이 좀 더 간결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제시하는 스타일이나 소개하는 브랜드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웠고, 그들이 제안하는 옷이나 스타일을 소비하게 되었다.
플랫폼의 맛(?)에 취해 푹 빠져있던 지난 10여년의 시간을 돌이켜 생각 해 보니 나의 쇼핑 패턴이 점차 단순해졌다는 것을 깨닳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사고 싶은 옷'을 찾았다면 지금은 옷을 보고 사고싶다고 느꼈다. 내가 어떤 스타일이 잘 어울릴지, 어떤 옷을 사고싶은지 생각하기 보다는 플랫폼이 정해 준 나의 스타일, 내가 관심있을만한 상품들 중에서 사고싶은 것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날이 추우니까 가디건을 하나 사볼까 싶었는데 좋아하는 브랜드라던지 좋아하는 색이나 디자인을 떠올리지 않고 바로 플랫폼 앱의 카테고리를 눌러 '가디건' 항목에서 제품을 죽 보고있었다. 사실 이러기를 한달째인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쉽게 구매하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는 이런 탐색의 과정을 거쳐서 구매했었는데 이번에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왜 내가 사고싶은 것 보다 살만한 것을 찾게된걸까?
우수한 접근성, 편리한 소비 과정에 곁들여진 높은 신뢰도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온라인 쇼핑에 대한 신뢰도가 낮았다. 인터넷으로 결제하면 사기를 당하진 않을까? 제대로 된 상품이 오는걸까? 컴퓨터로만 제품을 보고 나한테 맞는 옷일지 어떻게 알아? 등, 신뢰에 대한 문제가 컸다. 하지만 온라인 쇼핑의 안정성이 입증되어서 신뢰를 얻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하는 오프라인 쇼핑의 성지들 명동, 동대문, 이대앞은 언제 어디서든 간편하게 클릭 몇 번으로 제품을 고르고, 가격을 비교하고, 구매할 수 있는 온라인 쇼핑에 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것이 오프라인으로 구매하는 것 보다 얼마나 더 이득인지 동의하지 못하는 일부의 소비자들을 겨냥하기 위해 이커머스는 점점 구매의 여정을 짧고 간결하게 발전시켰다. 신뢰의 문제를 편리함으로 승부 보겠다는 것이다. 일주일이 걸리던 택배 시스템이 1~2일만에 배송이 가능하도록 했고 급기야 오늘 주문하면 오늘 배송이 완료되는 서비스까지 론칭했다. 이 것으로도 모자라서 언제 떠날지 모르는 고객들을 묶어두기 위해서 간편 결제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사용한다는 네이버와 카카오에서 내 놓은 페이 시스템을 비롯해서 무신사 페이, 쿠팡 페이 등 플랫폼은 자신들만의 페이 채널까지 구축하고 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불러 온 소비자들을 다른 플랫폼에 뺏기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편리성을 강화하는 행보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이 '당연'해 졌다.
소호몰, 온라인 쇼핑몰이라고 부르는 그 곳도 사실은 플랫폼이다. 스타일난다, 멋남, 본지샵 같은 추억의 쇼핑몰들도 카페24의 호스팅을 기반으로 구축된 사이트들이었는데 한마디로 카페24가 온라인 쇼핑몰의 플랫폼 같은 것이었다. 카페 24가 호스팅을 재공하는 온라인 커머스 사이트를 한 곳에 모아서 노출하는 기능이 없을 뿐이었는데, 이 호스팅 서비스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쇼핑몰을 모아 둔 플랫폼으로 지그재그가 생겨났다. 이렇듯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온라인 쇼핑몰에 일일이 접속해서 제품이나 가격을 비교하는 것도 버거워진 우리들에게 '플랫폼'은 그야말로 '한 자리'에서 다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소비의 가속화로 안내해 주었다. 이 때문에 나 또한 플랫폼 없이는 쇼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식음료를 구입할때도 마켓컬리나 이마트 앱으로 주문을 했는데, 이런 편리함에 익숙해지다보니 이 소비가 필요한지 여부를 생각하는 것 보다 '일단 보고 필요한지를 판단'하게 되었다. 소비의 편리함은 구매 여정의 간소화를 초월해서 '구매를 고민하는 것'조차 간소화 시켜버린 것이다.
추천 알고리즘, 너때문이야.
모든 산업이 온라인화를 이루며 넘쳐나는 경쟁자들 사이에서 스스로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하는 것 중 하나가 '개인화 추천 솔루션'이다. 연령, 성별을 비롯해 개인의 관심사나 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관심도가 높을것으로 추정되는 컨텐츠를 선 노출 시키는 것인데 가장 쉽게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있다. 특히 이 것 때문에 소비의 여부를 먼저 판단하지 않고 '일단 보고 판단하자'로 소비 습관이 굳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알고리즘의 영향은 유튜브 컨텐츠나 유튜브 뮤직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데, 나는 이제 음악이나 영상 취향도 알고리즘이 이끄는대로 바뀌었다. "어떤 음악 좋아해?"라고 하면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음악"이라고 대답하는 정도랄까. 이와 마찬가지로 쿠팡에서 '회원님을 위한 추천 상품'에는 실제로 내가 혹할만한 상품이 진열되어있고, 무신사에서 '회원님을 위한 추천' 상품에는 내 마음에 쏙 드는 상품들이 들어있다. 만약 이 추천 알고리즘이 없었다면 플랫폼마다 취향에 따라서 사용자가 나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플랫폼들은 '특정 취향'만을 타겟팅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입맛에 맞는 상품과 컨텐츠를 보여주고 소비유도하여 최대 이윤을 창출하고자 했고 그것을 정확히 해결해 준 것이 이 추천 솔루션이다.
취향을 되찾자
이런 글을 쓰고있지만 사실 나는 패션 플랫폼의 마케터이다. 사람들이 크게 고민하지 않고 내가 만든 광고를 보고 바로 구매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좋은 성과가 된다. 물론 나는 개인화 추천 솔루션, 알고리즘, 최적화 같은 것들을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정작 이런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먼저 내가 취향을 잃게되었기 때문이다. 제품이 출시되기 전부터 출시되고 시즌오프를 거쳐 다음년도 역시즌 세일에 올라오기까지 여러번 보고 또 보면서 사지 않아도 이미 가진 것 같고, 가지고 있지 않으면 가져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소비하는 것에 질려있음에도 눈으로 보고 있으니 마음이 동해서 설렘이 없는 소비를 한지 벌써 2년 쯤 되었다. 그리고 사고싶은 것이 무엇인지 정하지 못하고 바쁘게 여러 앱을 껐다 켜면서, 왜 이렇게 되었나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플랫폼이 주는 이득은 분명히 있다. 번거롭게 여러 사이트에 가입하는 일을 줄여주고 그들간의 경쟁 사이에서 가격 혜택이나 양질의 제품이 생산되는 것들이 그렇다. 그러니까 플랫폼을 이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플랫폼이 우리에게 주는 이점은 잘 활용하면서 내 취향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소비 전에 늘 사고해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사고싶은 가디건을 찾지 못해서 플랫폼을 여러곳 둘러본다. 그래도 이제는 어떤색, 어떤 디자인의 가디건을 갖고싶다는 것까지 마음을 정하면서 다시 내 취향을 되찾아가고 있다. 알고리즘이 정해주는 것이 내 취향이 아니라 내 취향을 알고리즘이 참고하는 것, 그래서 내 취향과 필요를 따르는 소비 주도권을 꼭 지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