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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Feb 21. 2024

그 시절, 쿠니사격장의 '언니들'은 잘 살고 있을까.

  원근법이 강조된 그림에서 전면에 나와 있는 주인공보다 배경이 더 흥미를 끄는 경우가 있다. 종군화가 이수억의 1952년 작 <구두닦이 소년>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 같다. 구두 닦는 통을 메고 구둣솔을 손에 쥐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서 있는 어린 소년의 뒤로 여러 인물이 지나가고 있다. 밑동이 잘린 바지를 입고 목발을 짚고 걸어가는 상이군인, 의자에 앉아 군화를 내민 미군의 모습에서 한국전쟁 시기 도시의 풍경을 살펴볼 수 있다. 구두닦이 소년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미군의 군화를 닦고 있고 그 옆에는 화려한 옷차림에 담배 연기를 뿜는 여성들이 서 있다. 미군의 애인, 즉 기지촌 여성들이다.




  기지촌 여성들은 한국전쟁 시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해방 무렵 미군정 시기에도 그녀들은 존재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이응노의 1946년 작 <양색시>라는 작품이다. 짧은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여성 세 명이 지나가자, 거리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녀들에게 쏠린다. 모두가 무채색인 가운데 양색시들만 원색의 알록달록한 상태이다. 이들은 이 공간에 소속되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호기심 어린 시선과 업신여기는 시선이 교차한다. 화가는 그림 아래 "그대들의 자태를 바라볼 때에 눈물이 앞을 가리워 마지 않는다. 하루라도 빨리 반성하여 새 옷을 벗고 직장으로, 제 2국민의 현모가 되어 주기를 원하노라"라는 화제까지 붙여 놓았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삶을 '반성해야 하는' 대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매향리 쿠니사격장 내부를 살펴보다가 전만규 위원장님께 이곳 미군 기지 부근에도 기지촌 여성 관련한 흔적이 남아 있는지를 여쭈어보았다. 지금은 폐가가 되어 방치된 채로 남아 있는 집 한 채가 있다고 했다. 쿠니사격장에서 차로 3분여 거리 떨어진 도로변에 슬레이트 지붕의 건물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곳이 1990년대까지도 '양색시' 집으로 운영되었던 곳이라고 했다.



  그 무렵 나는 '양색시' 또는 '양공주'라 불리던 '미군 위안부' 문제를 새롭게 접하고 있었다. 집 근처의 부평역사박물관에서 하는 <헬로우 애스컴 시티, 굿바이 캠프마켓> 특별전을 보고 왔었고, 의정부 역사교사모임 선생님들이 주관하는 미군기지 관련한 답사를 다녀왔었다.


  인천 부평에는 일제강점기 조병창이 있었고 해방 이후 주인이 바뀌어 미군 부대가 자리 잡았다가 2020년에 이르러서야 반환이 이루어졌다. 인천 부평 캠프마켓 반환과 관련하여 진행된 특별전에는 미군기지 내에서 사용되었던 물건들이 전시되었다. 전시 공간 중반부를 지나면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었다. 기지촌 여성, 그리고 그들과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동, 그 아이들이 버려진 고아원 등의 자료가 등장했다. 미군 기지를 설명할 때는 그 안에서 생활했던 군인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로 인해 파생된 기지촌 부근의 사회상까지도 온전한 역사로 포함되어야 함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기지촌 여성들을 일컫는 단어는 다양했다. '미군 위안부', '양공주', '양갈보' 등의 표현도 있었지만, 그들은 종종 '민간 외교관', '산업 역군'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들의 노동을 통해 달러가 국내로 흘러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녀들을 통해 흘러나온 미군 물자들은 남대문 시장에서 유통되어 중산층 가정으로 흘러 들어갔다. 


박물관의 패널에는 이와 관련하여 "'부덕한' 미군 위안부가 현물 화대조로 취득한 미제 물품은 그 '부도덕한' 경로에도 불구하고 남대문 시장으로 집결되며 '보통' 중산층이 정당할 수 있는 물품으로 둔갑했다."라고 쓰여 있었다. 유독 작은따옴표가 많은 문장 중 하나였다. '부덕한', '부도덕한', '보통'이라는 단어들을 나열하면서 이러한 사회 구조의 아이러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과연 그녀들에게 '반성하며 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었다.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불법의 삶을 살고 있었으나 합법의 영역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성매매는 불법이었으나 이들의 성병 관리는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성병에 걸린 여성들은 분리 수용되어 감금되었다. 포주들은 이런 여성들을 빼 오기 위해 경찰에게 뇌물을 주었고, 여성들은 그 돈을 빚으로 지고 사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성병 치료차 페니실린 주사를 맞다가 과민성 쇼크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정부 역사교사모임에서 진행하는 답사 때 동두천 미군기지와 클럽거리, 공동묘지, 낙검자 수용소 등을 둘러봤다. 답사에 참가한 이들이 저마다의 생각을 나누다가도 참담한 마음이 들어 입을 다물게 되었던 장소 중 하나가 소위 '몽키하우스'라고 불리던 낙검자 수용소였다. 기지촌 여성들은 성명 검사를 받고 떨어지면 낙검자 수용소에 입소해서 검사에 합격할 때까지 강제 수용을 당했다. 감금당한 여성들이 쇠창살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 같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몽키 하우스'라고도 불렀다. 의정부역사교사모임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기지촌 여성들을 돕는 두레방이라는 단체를 소개해 주었다. 활동가분들은 '그분들', '기지촌 여성들' 등의 단어 대신 '언니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언니들', 상대를 타자화하지 않으면서 호명하는 그 단어가 인상적이었다.


의정부여고에 근무하는 맹수용 선생님은 미군 기지와 기지촌 여성 문제와 관련하여 진행해 온 프로젝트 수업 사례를 소개해 주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은 이런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우리 역사에 있던 윤락여성들이 떠오른다. 몸을 파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앞서지만 대체 그 대가로 얻은 것이 무엇이길래 '팔았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인가? 누가, 왜, 감히? 여성들을 그런 곳으로 내몬 것은 여성 스스로가 아니라 사회와 제도이다. 돈으로 다른 사람을 사려는 행위를 왜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사실로 문제제기하는 사람더러 예민하다고 하는 사람은? 윤락여성이 나쁘거나 나쁘지 않다는 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건 숨어 있는 더 나쁜 사람들이다."


'기지촌 여성' 문제를 이야기할 때, 눈에 보이는 당사자뿐 아니라, 이러한 시스템에 유지되도록 협력했던 숨은 이들을 함께 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기지촌 여성들을 감시했던 포주, 그들과 뒷거래로 연결되어 있던 경찰, 달러를 벌어오는 산업역군이라며 이들을 관리했던 정부, 이들은 다 빠져버린 채, '너의 삶을 반성하라'라고 호통치는 일은 또 다른 폭력이 아니겠는가.


  몇 달 후, 다시 방문한 매향리 쿠니사격장 주변의 양색시 집은 철거되어 사라진 상태였다. 기지촌 여성의 삶은 지워버리고 싶고, 외면하고 싶기도 한 역사의 한 단면일지도 모르겠다. 불편한 역사이기도 하겠으나, 이 또한 쿠니사격장 역사의 한 조각이니 보존될 수 있었으면 했다. 역사를 지워버리기는 이렇게 쉽다. 


하지만 그 무렵 평택 미군기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는 연극이 상연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들이 직접 무대에 서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했다.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의 논의조차 표면화되지 못한 존재들을 기억하는 작업, 당사자가 직접 발화하도록 하는 작업이 갖는 의미는 중요하다.

매향리 쿠니사격장 방문, 의정부역사교사모임의 낙검자 수용소 답사, 그리고 그즈음 보게 된 부평역사박물관 특별전은 세상에 존재했으나 미처 보지 못했던 이들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절, 매향리 쿠니사격장의 ‘언니들’은 잘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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