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님, 지금 여기 있는 테이블이요. 현판을 짜서 만드신 거잖아요. 이 현판은 어디서 사 오신 거예요?"
"우리 집이 원래 일본 사람이 살던 집이었거든. 근데 해방 이후에 우리 엄마가 불하받아서 산 거야. 그때 건물 앞에 이 현판이 걸려 있었어."
"그러면 이 현판은 최소한 일제강점기 이전에 제작된 거겠네요."
"이거 집에 걸려 있던 거를 우리 집 장롱 위에다가 올려놨다가 내가 몇 해 전에 게스트하우스 열면서 이렇게 테이블로 짠 거지."
2018년 늦여름, 나는 서울 용산 후암동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주인분과 거실에 놓인 테이블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날은 큰맘 먹고 숙소를 예약한 날이었다. 남편과 아들은 공동육아에서 진행하는 1박 캠프에 참여하였고, 온전히 나 혼자 집에서 주말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 기회가 너무 귀해서 어디 나가서 나 혼자 여행해 볼까 해서 찾은 곳이 후암동의 한 게스트하우스였다. 이용객들의 후기가 많지는 않았지만, 적산가옥을 개조한 곳이라 했고 무엇보다 숙박료가 저렴했다.
그러나 숙소에 도착해서 배정된 방문을 열었을 때, '나홀로 여행'의 환상은 사라지고 말았다. 고시원 수준의 작은 방에는 침대만 덩그러니 있었다. 일제시기 가옥이라는 설명에만 혹해서 급하게 예약한 탓이었다. 캐리어를 풀어놓고 숙소에서 나와 후암동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이 1936년 제작한 <대경성부대관> 지도를 들고 당시의 골목과 오늘날 골목을 비교했고, 드문드문 지금도 남아 있는 삼각 지붕의 일제 가옥들을 찾으며 다녔다. 후암동 골목은 조용했다. 이따금 주택 담장이나 지붕에 앉은 고양이나 문 앞 의자에 지팡이를 짚고 앉아 계신 할머니들과 눈이 마주칠 뿐이었다. 몇 시간을 따가운 햇볕 아래 조용한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불현듯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맥주나 한 캔 따서 한일전이나 볼 걸 그랬나 싶었다.
해 질 무렵 게스트하우스로 되돌아갔다. 방에 있기가 답답해서 거실로 나왔다. 서너 개의 방이 있는 이곳에서 투숙객은 나 혼자인 듯했다. 노트북을 꺼내 들고 오늘 후암동 골목에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잘생긴 청년 한 명이 들어왔다. 미술학원에 있을 아그리파 조각상처럼 생긴 청년이었는데, 문제는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이었다. 아그리파 청년은 환한 미소를 띠며 "Hi"하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이후 내가 그와의 대화에서 명쾌하게 알아들은 건, 이 단어 하나뿐이었다. 청년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의미 없는 '아하'를 남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무렵, "저는 북한 정책 센터에 있어요."라고 했다. 또박또박 한국말로 말이다. 한국말을 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이야기할 것이지. 그는 시카고대학 정치외교학과에 다니고 있으며 북한정치를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이때 거실로 오신 게스트하우스의 주인분은 "우리 집은 외국인들한테 더 유명한 곳이야. 한국 기관에 파견 나오고 그러면, 우리 집에서 몇 달씩 묵고 그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곳 게스트하우스 지월장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일흔을 넘긴 권 여사님은 자신의 어머니가 해방 이후에 이 집을 매입했다고 했다. 이전까지는 세도가 대단한 일본인 자본가가 살았다고 했다. "이름이 서도신장인가, 일본어로 니시지마 신조우인가 그래." 그러면서 세간의 풍문도 덧붙여 이야기하셨다. "그런데 우리 집 규모가 너무 커서 그런가.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이 이토 히로부미가 살았던 집이라고도 하고, 그 첩인 배정자가 살던 집이라고도 그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자리에서 '서도신장'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검색창에 넣어보았다. 그러자 그의 생년월일과 경력이 화면에 떴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시민명감>이라 하여, 당시에 경성에 거주하고 있던 주요 인사들을 정리한 책이 발행되었던 모양이고, 이 책의 내용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아카이빙해 둔 것이었다. 서도신장, 일본어 발음으로 니시지마 신조는 이 책에 수록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1876년생인 그는 1909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해 이후 평양, 마산, 사리원 지점장을 했던 인물이었다.
서울의 한 게스트하우스 거실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북한 정치를 전공한다는 미국 청년이 들어왔고, 자기 집에 엄청 부자 일본인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사님이 나타났다. 드라마틱한 장치 요소를 개연성 없이 구겨 넣은 것처럼, 뭔가 툭툭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