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07. 24
순탄하지만 않은 고행이 시간이 될게 뻔한 날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 ‘비’는 오락가락 정신을 못 차렸지만 나의 두뇌는 더욱 선명하게 돌아갔다. 이유는 단 하나 길을 잃게 될 두려움이 모든 감각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손짓을 하며 부르는 이도, 배웅을 위해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만, 숲의 곁엔 내가 있고 나의 곁엔 숲이 존재했다. 엄마의 품과 다르지만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여름이니까. 그 열기가 당연한 것일수도 있지만)
머뭇거리는 시간을 줄여야 땀을 빼지 않고 정상에 다다를 확률이 높아진다. 넓다란 숲속 나무 아래 혼자이니 묵묵히 정상을 향하려 했지만 결코 가만있지 않을 녀석이다. 그 녀석이 나타났다. 가방을 뒤져 꺼낸 나의 또 다른 눈, 미러리스 카메라다. 얼굴을 가렸던 마스크를 턱밑으로 내려 초점을 맞춘다. 산새의 울음소리마저 담길만큼 고요한 울창한 숲속. 셔터 누르는 소리가 숲속을 울러퍼졌다. “철컥” 사람들로 혼잡해야할 이곳, 진정 나 혼자뿐이렸다. 묘한 감정이 흐른다. 텅빈 술길이지만 길위에 깔린 야자수 매트가 아름다운 선을 만들고 난 그 위에서 모델이 된다. 모델 특유의 무표정을 지으며 워킹에 집중한다. 관객은 서어나무, 섬개벗나무, 굴거리 나무 등이다. 키가 조금만 더 컷더라면 모델을 꿈꾸었던 나. 누군가 볼세라 숲속 누런 야자수 매트 위에서 런웨이를 즐긴다. 신속하게 정상을 올라야겠다는 생각은 잊어버린 채 흥락에 빠졌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는 중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버스에서 같이 내렸던 장발의 아저씨이다. 올듯말듯한 모습에 잘못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뒤를 잡혔다. 나를 순식간에 앞질러 달아나는 모습에 흥에 취해 희희낙락하던 정신이 번쩍뜨였다. 계획이 더 뒤틀어지기 전에 자세를 고쳐잡고 앞만 보며 걷는 장발의 아저씨의 뒤를 쫒았다. 잠시라도 3번째 눈을 떳을 경우엔 멀리 도망친다.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치 않는 그럴라치면 목줄기로 여름의 폭포수가 흘러내렸다.
첫번째 휴식공간 속밭 대피소에 도착이다. 겨울의 어지러운 공사의 현장은 사라지고 말끔히 정리된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져 왔다. 몸에서 빠진 30%의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생수를 들이키자 식도를 타고 흘러 위장까지 흘러간 물줄기에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목도 축였겠다. 의자에 앉아 쉬어볼까하며 놓쳐서는 안 될 장발 아저씨의 위치를 찾는다. 작은 배낭에 짧은바지, 물에 빠트렸다가 건져도 금방 마를 것 같은 연두색 티셔츠를 입은 아저씨. 더위를 느끼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무더위는 그렇게 호락호락 않다. 가방에서 꺼낸 물을 입으로 가져간다. 툭 튀어 나온 성대가 위 아래로 울렁울렁 섹시함에 반했다. 이제 쉬겠지. 막 엉덩이를 의자에 내려놓으려는 찰나 장발의 아저씨는 쉼도 없이 멈췄던 엔진의 시동을 건다.
데자뷰인가? 몇번의 등산에 격어본 듯한 착각은 예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아마 포기보다 제3의 눈에 더 애착이 갔다.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메모리 카드를 뒤졌다. 500장 이상의 어마어마한 사진이 메모리카드에 가득하다. 한라산의 모든 걸 내품에 담았다고 생각한다.
그때와는 다르다. 각오를 다지고 다졌다. 단시간에 기어코 정상에 오르리다. 그렇게 잘 정돈 된 속밭의 대피소의 짧은 첫만남은 의자의 달콤함도 못보고 끝이 났다.
고도는 높아지고 백록담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길은 더욱더 거칠고 까칠해졌다. 거친 돌길을 감쌌던 야자수매트는 사라지고 돌길의 만남이 비일비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악에 특화된 나의 운동 신경으로 돌의 제약은 무의미하다. 아저씨의 등짝만 바라보며 걷던 나는 드디어 앞서기 시작했다. 속이 후련해진다. 카메라의 셔터만 제어해도 간단히 해결되는 방법이다. 견재할 대상이 사라진 추격이란 재미가 없어서일까.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나도 모르게 장발 아저씨와의 거리를 잰다. 너무 멀리도 너무 가까워도 아니된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 뻔히 보이는 행동이라 여겼을까? 눈치를 챈듯하다. 상대방의 눈초리도 심상치 않다. 힐금힐금 쳐다보는 시선이 뜨겁게 다가온다. 겉으로 드러내진 야수의 송곳니에 불꽃이 튄다. 감당할 수 있을꺼야. 그의 본성만큼 아직 나의 본성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삐긋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잡힐먹힐정도로 자극제가 되지만 또 한편으론 화를 부르기 십상이다. 그냥 혼자갈까. 아니야 혼자보단 둘이지. 고민만 늘어놓는 사이 산행에 또 다른 경쟁자까지 끼어들었다.
속밭 대피소를 다다르기 전 20대 대학생으로 보이던 남성이다. 걸음이 빨라 놀랐지만 중간쯤 지쳤는지 종적을 감춘 후 잊고 있었다. 언제부터 따라 온 건지 모르지만 뒤꽁무니까지 따라잡혔다. 경쟁자가 한 명 더 늘어난 샘이다. 총 길이가 9.6km. 성판악 입구 750m에서 시작해 속밭대피소의 1200m를 지나, 두번째 대피소인 1500m 고지인 진달래밭까지는 대략 3km 남았다. 중간 1606m 사라오름까지는 1.7km이다. 힘들지는 않지만 욕심의 초초함이 몸을 억누른다. 그들에게서 뒤쳐질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선 사진은 백록담을 생각하며 아껴두기로 하며 더욱 빨리 발을 놀렸다. 숨은 가빠오고 속도는 현저히 줄어든다. 마스크 위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판이다. 특화 된 운동 신경을 가졌더라도 젊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가장 젊은 대학생이 앞을 치고 나간다. 점점 멀어지는 거리 어느새 모습마저 감췄다, 다행이 나보다 연배일 것 같은 장발 아저씨 역시 엎치락뒤치락 말 한마디 없이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긴다.
성판악을 오른지 2시간이 지나서 진달래밭 대피소를 빠져나와 그토록 잡고싶은 정상을 향한다. 입구 초반에 오락가락하던 빗방울이 다시금 화두에 올라섰다. 정상을 삼키고 뱉는 과정을 반복하는 하얀 안개의 정상 군림이다.
비닐 우의를 입고 쉴 새 없이 내려오는 사람들의 행렬에 반복적인 말만 내뱉는다. “오르지 말았어야 했어” 비는 아니지만 비맞은 강아지꼴이 되기 딱이다. 그렇다고 지금 멈추기엔 1800m 고지를 지났다. 6월인데 비 맞고 얼어죽지는 하겠어. 구름안개에 가려진 햇살의 더위는 어느새 시원한 에어컨이 되었다. 걱정에 휘말린 두뇌는 식었고 평정심을 되찾은 마음은 발걸음에 속도를 더 올렸다.
1920, 1935, 1950m 드디어 정상을 밟았다. 생각한 것보다 정상에 발을 밟은 등산객의 수가 적다. 수많은 요인중 하나로 출발에 앞서 떨어진 빗방울과, 우의를 입고 내려온 사람들이라 짐작한다. 역시 정상이 틀림없다. 강풍에 나의 부실한 몸뚱어리가 휘청거지만 백록담마저 보이질 않는다. 몇년 전 격은 바에 의하면 잠깐이라도 백록담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바람막이와 우의를 걸치고 나무데크에서 쪽잠을 청하는 외국인. 샤워를 하고 방금 나온듯 젖은 머리에 구름 안개속에 사진을 찍겠다며 갖은 포즈를 취하는 등산객은 모두가 같은 생각이다. 백록담에 올랐다는 자긍심을 남겨놓겠다는 의지다.
10분이 지나고 30분이 흘렀지만 바람에 밀려간 구름안개는 또 다른 구름 안개를 데려왔고 뫼비우스 고리에 갇혔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내 모습도 비 맞은 강아지꼴이다. 체온이 내려가 바들바들 떨리는 몸은 춥기까지하다. 야박하기 그지없는 백록담에 하산을 마음먹고 돌아서지만 발걸음이 쉽게 때이지 않는다. 백록담이 주는 환상에 목이 메여온다. 5분만 더, 아니 얼어죽겠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날때부터 백록담의 속내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7개월간의 긴 시간을 거슬러 만난 백록담이 야속하다. 추워 이제 집으러 가야겠다.
22.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