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떨어지는 날
[ 눈치 없는 나 ]
주말을 보내고 3일 후면 2년이 훌쩍 지나 3년쯤 되었을까. 6년 전 아는 동생의 소개로 만나게 된 또 다른 동생을 오랜만에 보게 된다. 어림잡아 4번째 만남이 성사되는 날이라 기억된다. 난 그 녀석을 위해 앞서 양조장 투어와 호텔에서 전시를 여는 국제화랑 미술제 초대장까지 날짜에 맡게 준비해두었다. 기다림의 설렘은 1초의 시간마저 더디게 흐르는 마술을 부렸다.
숙박에 돈을 허투루 버리지 말고, 불편하더라도 집에 내심 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녀석은 말을 귀뚱으로 흘러버리고 결국 호텔 같은 모텔에서 숙박을 강행했다. 계획과 다른 오류가 생겼지만 메시지를 주고받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만남의 약속 시간을 잡고 다음 날 일정의 조율을 마춘다.
8시와 9시 사이의 약속에 녀석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피곤해서 아직 자고 있을 것으로 예상과 달리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며 참고 기다렸다. 기다림의 미학은 늘 아름답다고 누군가 말했다. 9시 20분이 지나갈 무렵 고되게 기다린 전화벨이 귓가를 울렸다.
“죄송해요, 너무 피곤해서 이제 일어났네요.”
“괜찮아. 나올 준비 마치고 다시 연락해.”
20분을 넘어가기 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저 이제 준비 마쳤습니다.”
“그래 나 여기서 10분이면 갈 거야. 너가 있는 모텔 앞에 가서 전화할게.”
그 녀석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을 한 번 다녀갔지만 저장되지 않은 기억은 본인도 모르는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하는 헤프닝을 만들었다.
2020년에 터진 코로나는 여전하다. 여름이 되면 더욱 기승을 부려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화르르 타오른다. 제주에서만 하루 확진자 수가 1700여명을 육박한다. 조심해서 손해 볼 건 없다. 주먹 인사로 첫 만남을 장식한다.
어렵사리 성수기의 여름 휴가를 맞아 떠나온 여행은 호락호락할리가 없다. 치솟을때로 오른 여름휴가 물가는 상승곡선을 탔다. 이동에 가장 합리적이면서 편안한 렌터카를 빌리기로 한다. 샅샅이 뒤진 인터넷에서 가장 저렴한 렌터카를 빌리고 시계를 쳐다보나 11시가 넘어 점심 시간이 가까워졌고 하루의 반나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형 근처에 맛있는 고기 국수 집 없어요. 저 그거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어서요. 맛있는 거 먹어요.”
“아~ 그래. 그럼 이곳으로 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박의 말투가 돌아온다. 자기 딴에는 검색을 한 모양이다. 그럴 거면 묻지를 말아야 했을 것이다. 거세게 밀어붙여 결국은 앞전에 추천한 식당으로 가고만다.
대한민국은 주차난이 가장 심한 나라이다. 비빔냉 고기 국수와 고기 국수, 메밀 만두까지 시켰다. 맛은 여전하지만 물가 상승의 손길이 식당까지 휩쓸고 갔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얻어먹기에 고맙기도 했지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집에서 재워준다고 말에 밥까지 사준 녀석이 기특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이소를 들러 휴대폰 거치대를 사고 용머리 해안으로 달려가면 되었다.
마침 세수 비누가 떨어져 잘 되었다 싶었다. 이렇게 방문한 겸 난 비누를 사기로 맘먹었다. 2, 3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비누를 손에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군것질거리가 펼쳐졌다. 위장이 달달함을 원했다. 비스킷 하나를 집어 들고 무인 계산대로 향했다. 비스킷을 슬며시 동생 계산대 앞에 올려놓으며 “야~ 이것도 하나 계산해”
“네에~ 제가요. 왜요. 전 이거 안 먹어요. 제주 왔으면 형이 사줘야줘.”
1000원 짜리 비스킷 하나쯤이야 생각했던 내 잘못이었다. 얼굴은 달아오르고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계산은 3개의 비누와 함께 내가 처리해야 했다. 여기서 안산다고 하면 바보가 된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기분은 묘하게 꿀꿀하고 찝찝하다. 어쨌든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형 과자는 왜 산 거에요.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달달한 게 당겨서 샀지.” 부끄러움에 말을 얼버무리며 지나가려 했지만 그건 시작이었다.
“아~ 맞다. 좀 전에 국수도 제가 샀잖아요. 혹시 저한테 계속 얻어먹으려는 생각은 아니시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화끈거리며 화가 단전에서부터 치민다.
무슨 말이지? 내가 샀어야 했나. 아니면 각자 자기가 먹은 것은 따로 계산을 해야 했었나? IQ100 머릿속 두뇌는 오류를 일어켰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단어가 늪으로 빨려들어 갔다.
“맛있는 밥 먹으로 가시죠.”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가 아닌 말 그대로 밥 먹으로 가자는 대사였다. 눈치 없이 계산도 하지 않고 식당을 박차고 나온 나의 잘못이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이제까지 가졌던 정이 뚝 떨어진다. 잠도 재워주고 양조투어에 미술전시회까지 챙겨 주려했던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다. 나보다 돈을 잘 버는 녀석. 고마움에 밥을 사주려니 했던 나는 악마의 달콤한 주문에 걸렸던 게 분명하다. 제주에 거주한다고 재워주는 꼭 재워줘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라. 나 또한 함께 있는 게 불편할지 모른다.
말 한마디의 서운함이 재워 주고 싶은 마음도, 미술 전시회를 데려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되려 넌 왜 나의 집에서 자려고 하냐는 질문을 수차례 던졌다.
과거의 잡다한 기억이 머리속을 툭툭치고 나온다.
몇 년 전 제주에서 일을 해 보겠다며 내려와 기거한 한 녀석이 있었다. 참 희한한 놈이었다. 1주가 흐르고 2주가 지나갈 때까지 평온하게 지냈다. 그러나 나의 생활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다. 그 녀석도 그건 알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연락을 해왔다.
“형 저녁 먹었어요.”
“아니”
“그럼 치킨에 맥주 한 잔 할래요.” 난 술보다 밥인데 하는 수 없이 OK 사인을 보낸다. 썩 기분 내키지 않는, 어쩔 수 없는 저녁밥이 아닌 저녁을 때웠다. 며칠이 지나고.
“야~ 계속 있을 거면 생활비라도 좀 보태라. 전기도 물도 사용하니까”
그 한마디는 그 녀석의 제주 생활을 종점을 찍었다. 밥 한 끼 먹자는 말도 없던 녀석은 다 다음날 일을 관두고 서울로 돌아간다는 통보를 해왔다. 그 녀석이 떠나고 2년이 지나갔지만 아직 연락 한 번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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