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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29. 2020

직장인 여행자-(7)맥주거리의 청춘들_하노이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청춘


토요일 밤, 하노이에 위치한 맥주거리는 나라별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모아놓은 게 아닐까 느껴질 만큼 활기가 넘쳐. 거리에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음악 덕분에 정말 공기마저 시끄러운 느낌이야.


술에 취해 흥이 오른 사람, 행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길에서 춤을 추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웃으면서 바라보는 지나가는 사람들. 조금은 바보 같은 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너그러운 주말의 밤.


사실 이런 느낌이 그리웠어. 어렸을 땐 시끄러운 클럽을 참 자주 다녔는데,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 잊고 살았어. 금요일 밤은 언제나 피곤했고, 하루를 밤을 새워 놀면 그다음 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마지막으로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 온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이 시끄러운 분위기의 일부를 꿈꾸며, 목욕탕 의자에 앉아 맥주 한 병을 시켰어. 맥주를 마시며 맥주 거리의 청춘들을 보니, 스무 살의 내 모습이 생각나더라. 수능이 끝내고 막 대학에 입학했던 그땐 억압이 풀렸다는 해방감에 세상 무서울 게 없었고, 어른들이 하는 모든 걸 경험하고 싶어 했어.


그래서 머리는 파마를 했다가 아주 밝은 색으로 염색도 했고, 일주일에 4번 이상 술을 마셨고, 거의 매주 금요일마다 클럽에 갔었어. 그땐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매주 새로운 친구가 생겼어. 하루도 심심할 틈이 없었고 지금의 일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롭고 재미있었어.


평생 그렇게 살 줄 알았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 그런 일들이 귀찮아지더라. 금요일마다 시끄러운 곳을 찾아가는 대신, 영화를 보거나 조용히 맥주 한잔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게 되더라고.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거지.

밤을 새도 끄떡없던 그때와 달리, 요즘엔 새벽 1시만 넘어도 눈이 깜박깜박 감겨.



지금 저기서 술을 마시고 있는 저 젊은 청년들은 과거의 나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상태겠지. 그땐 체력만 넘치는 게 아니라, 꿈에 대한 열정도 뜨거웠어.

그때의 난 직장인 같은 따분한 직업은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그런 삶을 사는 그들을 처량하고 불쌍한 인생이야 라고 정의했었는데 말이야. 이젠 부정하던 그 모습이 정확히 내 모습이 됐어.



과거를 회상하며, 또 다른 맥주 한 병을 주문했어.

젊음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거리는 뜨겁고, 그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부니 술이 술술 들어가더라고. 그렇게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옆에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어.



“안녕, 날씨가 정말 좋다.”

외국에 있다는 사실과 맥주가 만든 용기 덕분에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먼저 말을 걸게 되더라.


“맞아. 요즘 하노이는 정말 시원해.”


요즘 이란 말을 하는 거보니, 꽤 오래 하노이에 있었나 봐.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건데 그는 하노이에 온 지 약 2년 반이 됐고 하노이에서 프랑스어 가르치고 있다고 했어.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데, ‘존’인가 ‘진’인가 하는 이름이었어.


“하노이에는 혼자 온 거야? 얼마나 머무를 예정이야?”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오려고 했는데, 회사 일 때문에 나 혼자만 오게 됐어. 5일 정도 있을 거야.”

“겨우 5일?”

“응. 휴가를 길게 쓸 수 없거든. 한국의 대부분 회사가 그래.”

“오 마이 갓, 진짜 안됐다. 프랑스 사람들은 휴가를 진짜 길게 가. 보통 매년 5주의 유급휴가가 주어지는데 보통 여름에 다들 떠나. 그래서 그 기간 동안은 파리 거리가 텅텅 비어.”

“5주라고? 진짜야?”


놀란 내 표정을 본 ‘존’인가 ‘진’은 제법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넌 네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돼. 한국에서 5주 동안 휴가를 떠나겠다는 말은,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야.”


한 동안 그에게 한국의 직장생활 문화에 대해 설명했어. 일이 끝나도 팀장이 퇴근하기 전에는 남아 있어야 하는 문화, 업무 시간 후 원치 않는 회식에 참석해야 하는 문화, 윗사람의 의견이 곧 정답이 되는 문화 등등.

그러자 그는 혹시 너 South Korea가 아니라 North Korea 사람이냐고 진지하게 물어봤어. 진짜 네가 봤어야 돼. 웃으면서 하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표정이었어.



직장을 주제로 한 대화가 끝난 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노트를 보며 물었어.

“근데 뭘 쓰는 거야? 글 쓰는 일을 해?”

“같이 오기로 했던 그에게 하노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쓰고 있어. 그날 봤던 풍경이나 느꼈던 생각을 적어, 돌아가면 그에게 들려 주려고. 그러면 그도 조금이나마 우리가 함께 여행했다고 느끼지 않을까 해서. 사실 나 혼자 여행 온 게 미안하기도 하고.”

“와, 넌 정말 다정하다. 만약 내가 그런 글을 받았다면 진심으로 감동받았을 거야.”

“맞아, 그도 그걸 알아야 할 텐데.”



우린 마주 보며 웃었고, 난 프랑스인에게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했어. 미대를 졸업하고 전시 기획 일을 하고 있다는 말과 너로 인해 와인에 흥미를 가지게 된 이야기, 30살이 넘어서 외국으로 훌쩍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강단 있는 사람이란 이야기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TMI 같은 이야기를 참 많이도 했네. 시원한 날씨와 함께 마신 술과 오랜만에 낯선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들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펼쳐놨어.



“너에게 많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네. 그를 사랑해?”

“음, 영화 겨울왕국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원하는걸 내가 원하는 것보다 우선순위에 놓는 것’ 이라고. 이 정의가 맞다면, 그를 사랑하는 것 같아. 어디를 가든 무의식적으로 다음엔 꼭 그와 함께 와야겠다 라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하게 되니까. 넌 어때?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내 질문을 들은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길 꺼려하는 서양인들의 특징 때문인가 라는 생각이 들며, 괜한 질문을 했나 라는 생각을 했어. 그리고 잠시 뒤 그가 침묵을 깨고 말을 이어갔어.



“있어. 근데 여기에는 없어.”

“여기? 그럼 프랑스에 있는 거야?”

“그녀는 죽었어, 몇 년 전에 파리 극장에서 테러가 발생했는데 그때 총에 맞아 죽었어.”



바타클랑 총격사건.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테러라고 꼽히며, 약 100여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그 사건.


망치로 머리를 땅 하고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며,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어.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런 예고 없이 한 순간에 떠나보낸 남자. 감히 공감할 수 조차 없는 그 마음을 다독여줄 어설픈 위로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어.



“그 사건이 있은 후에 정말 죽을 것 같았어. 그녀를 죽인 파리가 증오스러웠고 더 이상 그곳에 살 수가 없었어. 도시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묻어있으니까. 그래서 이곳으로 떠나왔어. 파리로부터 도망친 거지.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살다 보니 제법 살만해졌어. 이곳 맥주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만 또 금방 떠나. 대부분이 여행자인 이곳에서의 관계는 일시적이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 해도 하룻밤 사랑이 대부분이고, 이게 내가 이 거리를 좋아하는 이유야. 이제 더 이상 누군가를 깊게 만나고 싶지 않아.”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상처 받지 않은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애초에 상처 받을 수도 있는 일을 만들지 않는 거야.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적어도 다칠 일은 없으니까.



“맞아, 너의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요즘의 난 의미 없는 사람과 섹스는 하고 싶지 않아. 어렸을 때 했던 충동적인 사랑보단 안정감을 주는 사람을 만나 정착하고 싶어져. 진짜 사랑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자꾸 꿈을 꾸게 만들거든. 물론 네가 겪었던 아픔만큼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사랑을 원하는 걸 수도 있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건 내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기분이야. 숨을 쉬고 있는 몸뚱어리가 혐오스럽고 영혼은 사라져. 몸은 살아있지만 삶의 본질은 죽은 거야.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죽은 사람과 차이가 없어.”



너를 잃는다.

어떤 기분일까. 그때의 난 살아있는 걸까, 죽은 걸까.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프랑스 남자는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그 누구도 가슴 아픈 이별 따윈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건,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일 거야.

사랑이 조금만 덜 달콤했다면, 이 사랑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랑을 시작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또다시 사랑에 빠져. 그만큼 사랑은 중독적이니까. 아마 이 프랑스 남자도 분명 언젠가는 또다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겠지.

그게 사랑이야. 한번 사랑의 맛을 본 사람은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


사랑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자 불행이지. 사랑에 빠진 모든 이는 언젠가 사랑이 주는 그 달콤함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마치 이 프랑스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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