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무 Oct 23. 2022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 작가도 아니고 글을 쓰는 직업도 아니지만 건방지게 글과 권태기가 왔다. 아니지. 무언가 쓰고 싶기는 한데 뭘 써야 할지 모르겠으니 '권태기'는 맞는 단어가 아닌가?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며 시간은 흘렀고, 브런치에서는 "작가님 글이 보고 싶습니다.."라는 마음 쓰이는 재촉 알림이 왔다. 알림도 참 다양했다. "꾸준함이 재능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라던지 "작가님의 글을 기다리는 독자님들이 있어요."라던지 자꾸만 조급해져서 어플 알람을 꺼버리기까지 했다.


 최근 일 년 동안은 내 이야기에 취해서 글을 썼다. 뚜렷한 목표도 있었다. 글을 쓰고 브런치 북을 발행해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하고 싶다는 거였다. IT 회사원, 스터디 카페 사장, 블로거, 작가로 살아가는 부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렇게 [하루를 여러 번 살고 있습니다.]라는 에세이를 완성했다. 브런치에 연재하는 도중 칼럼이나 출간 제의가 오기도 해서 글 쓰는 내 모습에 꽤 빠져있었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다 털어내고 나니 더 이상 쓸게 없어졌다. 이젠 뭘 써야 될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너무나 재미있는 이야기와 색다른 주제가 넘쳤다. 브런치만 봐도 단숨에 마지막화까지 술술 읽히는 글들이 많았다. 공모전 출판 응모작들을 보니 세상에 이렇게 글을 잘 쓰시는 분들이 많구나 새삼 놀라웠다.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 내 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쌀쌀한 가을밤의 기온처럼 훅 떨어진 자신감은 우울한 생각만 들게 했다. 즐겁게 글을 올리던 블로그에 맛집 후기 한 편을 올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심지어 포스팅을 하다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이런 평범한 글을 누가 좋아할까? 다른 블로그 포스팅이 훨씬 재밌고 섬세하지 않나? 열심히 달려가다가 내가 왜 달리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끝을 스칠 , 물감을   새파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볼 , 무채색의 담벼락 옆을 지나가다  익은 다홍색  하나가 눈에 들어올 때면 미치도록 무언가 쓰고 었지만 생각이 이어지지가 않았다. 글을 쓰려고 화면 앞에 앉아있으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고   쓰다가는 저장도 하지 않은  노트북을 닫아버렸다.


 그러다 문득, 글이 써지지 않을 땐 무작정 필사를 한다던 한 작가님이 떠올랐다. 필사는 다른 사람의 글을 따라 쓰며 영감을 얻거나 서술 방식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경주 여행 중 작은 독립서점에서 구매했던 김초엽 작가님의 '책과 우연들'이라는 책을 펼쳤다.



<책과 우연들 중 -김초엽 작가>

 몇 권을 쌓아둔 노트의 아이디어 메모들도 다시 검토해보니 이미 누군가가 썼을 법한 그다지 새롭지 않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점차 나는 경험도 밑천도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중략--


 지구의 밤하늘에만 달이 뜨는 것이 아니라 달의 하늘에 지구가 뜰 수 있음을 알았을 때, 그 장면을 사람들이 사진으로라도 직접 목격했을 때 그들이 지녔던 지구에 대한 인식은 약간은 반드시 변했을 것이다.



 김초엽 작가님의 '책과 우연들' 보며 필사를 하다가 번뜩 정신이 들었다. 깨달음을 얻은 부분의 주제는 관점의 전환이었다. 지구에서 달을 보듯이 달에서도 지구를   있다. 미지의 어디선가에서도 우리를 볼 수 있다는 거였다. SF 세계관에서는 곰팡이, 버섯 그리고 식물도 무언가를 본다. 어느 순간  '전환점' 빠져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의 관점에서만 보는 건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구나.'


 회사에서 8시간 이상을 보내는 직장인에게 끝없는 글감이 쏟아져 나오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럼 나도 내 눈이 아닌 관점의 전환을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가 보든, 달이 보든, 곰팡이가 보든 아무튼 관점을 더 넓혀서 보는 것이다. 한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갇혀있던 공간에서 나가야 했다. 그 공간의 이름은 한계였다.


 앞으로는 좀 더 멀리서 나를 보고, 내 주위 모습을 보고, 다른 무언가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담아볼 계획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두근거리며 글을 썼다.

작가의 이전글 스물여덟, 직장 다니며 사장님이 되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