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채 May 23. 2024

[EP.1] 작은 진동에 비로소 움트는 마음

오사카 여행_1일차

  간사이 공항에 도착해 라피타 특급열차를 타고 난카이 난바역으로 이동했다. 한국과 사뭇 다른 건축물이 주는 신선함과 일본어로 안내되는 열차 내 방송에도 그저 마음이 들뜨는 여행자.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과 귓가에 맴도는 낯선 언어로 현재 내가 타국에 도착했음을 생생하게 체감했다. 누군가의 일상을 찰나에 포착하듯 바라보길 40분 정도 지났을까 무사히 난카이 난바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내린 눈으로 비행기 출발이 지연되고 복잡한 난카이 난바역에서 출구를 헤맨 탓에 여러모로 시간이 많이 허비된 상황. 원래 같았으면 오전 중에 도착해 호텔 로비에 짐만 맡기고 바로 나왔어야 했는데 도착하고 보니 체크인 시각인 3시였다. 겸사겸사 체크인하고 빠르게 룸 컨디션을 확인한 뒤 일정을 시작했다. 겨울의 한중간이었던 1월, 성질 급한 겨울 해는 이미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스파스미노에 온천'이었다. '주유패스'라는 여행객 교통권을 사용하여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관광지 중 하나였다. 비록 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이긴 했지만 온천에 대한 기대도 못지않게 컸다. '스파스미노에'는 전통적인 매력을 지닌 관광 온천으로 알려져 있었다. 설명만 들었을 때는 전통 온천과 비슷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일반적인 대중목욕탕과 흡사했다. 생각과 다른 모습에 다소 놀랐지만 다행히도 외부에 마련된 노천탕은 내가 기대했던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각 탕마다 온도가 달라서 취향에 맞게 선택하여 즐길 수 있었는데 나는 모든 탕을 체험한 뒤 노천탕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 황혼이 내려앉은 저녁 하늘과 서늘한 겨울 공기 속에서 즐기는 온천욕은 꽤 매력적이었다. 온천수의 독특한 촉감이 일반 수돗물과는 달라 흥미로웠다. 미끈미끈하다 해야 하나. 피부가 매끈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온천수의 효능인가 싶었다. 어떤 성분이 이런 효과를 가져오는지 궁금해하며 연신 감탄했다.  나지막이 혼자 '우와' 하며 읊조리는데 이 감흥을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나눌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 문득 쓸쓸해졌다. 연바람이 부는 쪽빛 하늘 아래, 그렇게 혼자만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온천욕을 마친 후 우메다 공중정원으로 이동했다. 원래는 ‘하루카스 300’의 야경을 보러 갈 계획이었으나 어긋난 일정 탓에 다음 날로 예정됐던 공중정원 일정을 앞당겼다. ‘하루카스 300’에 대한 호평이 자자했기에 기대를 많이 하고 있던 터였다. 시간에 쫓기듯 부랴부랴 감상하고 싶진 않았기에 비교적 기대치가 낮은 공중정원을 먼저 방문하기로 했다. 구글 지도를 따라 도착한 공중정원은 생각보다 좁고 낮았다. 차라리 먼저 오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미 들은 말이 있어 그런지 몰라도 큰 감동은 없었지만 야경이 선사하는 기본적인 재미는 충분했다. 명색이 관광지는 관광지라서 주변엔 너도나도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도 일행이 있었다면 같은 모습이었겠지. 왠지 혼자라는 사실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진을 찍어줄 동행이 없다는 것이 이리도 위축될 일인지 모르겠다만 그 순간엔 그랬다. 결국 눈동자만 몇 번 굴리다 돌아서려는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대로 떠났다가는 분명 후회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고민 끝에 용기 내 근처 한국인 관광객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그렇게 내 여행의 기념비적인 첫 번째 ‘남찍사’(남이 찍어준 사진)가 탄생했다.      


  혼자 밥 먹는 것조차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해내지 못하던 내가 사진 부탁을 하고 낯선 이의 카메라 앞에 서다니. 그게 무슨 별인인가 싶겠지만 나에겐 별일이었다. 스스로에게 전면에 나서며 자발적으로 집중을 요청하는 일이니까. 세상은 생각보다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세상이 신경 쓰였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설령 있다고 한들 한순간 지나고 말 생각일 뿐인데 난 그 불특정 타인의 머릿속에 떠오를 '혼자네?'라는 물음표가 유난히 두려웠다. 학창 시절 겪었던 일련의 소외감이 기저에 깔린 탓인지 몰라도 누군가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칠 물음표 하나가 천둥처럼 나에게 울려 퍼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낯선 군중 속에서 혼자 있는 상황을 피하려 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그 순간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초면인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공중정원 구경을 마치고 이동하던 중 한국에 있는 가족들로부터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는 안부 전화였다. 연말연시를 맞아 화려하게 반짝이는 오사카 거리를 걸어가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얼마 전까지 본 얼굴인데도 바다 건너 나와 있다고 괜히 더 애틋했다. 내가 돌연 혼자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족들은 적잖이 놀랐었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도 가장 내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애가 국내도 아닌 이역만리 타국으로 여행을 간다니. 그것도 혼자. 처음엔 장난치는 줄 알았단다. 나중에는 어찌 그런 결심을 했는지 그 결심 자체에 더 놀라는 눈치였다. 나조차 돌이켜 보면 그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꼭 그 순간이어야만 하거나 그 순간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가족들에게 오사카 길거리라도 보여주려 했으나 통화 품질이 좋지 못해 간단한 소감만 전하고 통화를 마쳤다. 따뜻한 얼굴들이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디지털 화면이 묘하게 공허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애초에 혼자였지만 다시 혼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옅은 허무함은 빠르게 휘발됐다. 첫 여행의 설렘이 그리 쉽게 꺼질 리 없었다. 저녁으로 먹을 타코야끼를 사기 위해 미리 알아둔 우메다역 근처 맛집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금세 쌓인 하루치 피로와 다가올 내일을 향한 기대가 한데 뭉쳐 동글동글 부푸는 밤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EP.0] 대장정의 서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