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이 되면 번역회사도 다닌 지 만으로 1년이 된다. 그 말은 취업비자의 만료일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 체코에서 취업을 하면 취업비자를 발급받는데, 정확히 고용계약 기간에 맞춰 비자를 발급받기 때문에 고용계약 종료일이 곧 비자 만료일이다. 그전에 비자를 연장하려면 고용계약도 사전에 논의하여 연장을 해 놓아야 한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번역회사에 한국인 번역가는 나밖에 없고 당장 내가 나가면 다시 한국인 번역가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고 게다가 나는 풀타임도 아닌 파트타임 근무자고 이렇게 저렴한 비용(?)에 노동력을 쓸 수 있는 회사는 나를 놓치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그리고... 괜히 긴장이 됐다. 혹시나 계약 연장이 안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연장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계속 되뇌며 팀 리더와 면담을 가졌다.
합법적인 체류의 이유가 고용인 경우에는 고용에 조금 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취업이 안 되면 체류도 불가능하고 또 반대로 고용이 끝나면 체류 역시 종료된다. 회사와 나 둘 중에 좀 더 아쉬운 쪽이 내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첫 채용 시에 연봉 협상도 제대로 안 하고 들어갔다. 뽑아만 주십쇼. 예.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 마음으로 들어가서 내가 받는 돈이 적은 지 적당한지 많은지도 제대로 가늠을 못 했다. 일 년 정도 일한 후에 돌아볼 여유가 생기니 이제라도 연봉 협상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취업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처음부터 협상을 제대로 하고 들어가라고 권하고 싶다.
팀 리더와는 꽤 긍정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내년에도 우리 회사와 함께 일하겠냐는 물음에 일하겠다고 답했고 회사도 팀도 모두 계속 일하기를 바란다는 답변을 들었다. 더불어 앞으로 받을 계약서는 1년 단위가 아닌 무기한이라는 좋은 소식도 들았다. 사실 체코는 법적으로 근로자가 1년 이상 근무할 시 2년째부터는 고용주가 고용계약을 무기한으로 제시해야 한다. 번역회사를 무기한 다닐 생각은 없지만 고용 종료일이 명시되지 않은 고용계약서는 비자 발급 시 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기 때문에(고용계약서가 1년 단위로 나오면 1년까지만 비자 발급이 가능하고 무기한인 경우 최대 2년까지 발급받을 수 있다) 무기한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연봉 협상이었는데, 이미 근무를 한 경력이 있어서 협상이 쉬울 줄 알았더니 오히려 회사에서 일한 동안의 내 성과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절차가 까다로워 보였다. 마치 자기소개서의 조금 다른 버전인 성과소개서가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 성과소개서는 팀 리더, 본부장, 프라하 지사장, 바르셀로나 지사장을 거쳐 뉴욕으로 간다. 가장 까다로운 것은 오히려 두 번째 단계인 본부장의 승인이라고 하는데 오며 가며 보던 본부장은 늘 웃는 얼굴이라서 그 말이 더 무섭게 들렸다. 웃는 얼굴들의 단호함이란 화난 얼굴들의 성남보다 무섭다.
성과소개서의 승인 절차가 짧게는 6개월이 걸린다고 하니 연봉 협상은 일단 접어두고 계약 연장만 하기로 했다. 후에 연장이 제대로 되고 비자 카드도 받으면 연봉 협상을 시도해봐야지.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는 단계를 넘어 노동의 가치를 키우는 단계로 올라서는 과정은 역시나 쉽지 않다. 자기 PR 시대라는 말은 이제 지겨운 카피라이터의 글귀가 된 듯하다. 스스로를 계속해서 증명하고 보여주고 성장하고 또다시 증명하는 날들에서 긍정적인 자극을 받았다가 잠깐 허무 해졌다를 반복하는 날이다. 똥만 싸도 박수받던 아가들의 시절은 다 어디로 갔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