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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Jun 23. 2024

01. 내 이름으로 살기

이름이 차지하는 정체성의 비중은 어느 정도 될까. ‘나는 나를 이름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면, 글쎄다. 한 번은 장난삼아 페이스북에 내 이름을 쳐 보았더니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주르륵 뜨기도 했다. 흔한 성씨도 아닌데 성과 이름이 같은 사람이 대한민국에 줄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만큼 부정 받았을 때 가장 모욕적인 것, 그만큼 당연히 나의 정체성의 일부인 것도 없을 것이다. 이름을 부정 받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은 아니다. 간혹 초등학교 시절에 이름으로 놀림을 받았던 것 말고는 누군가 내게 이름이 왜 그 이름이냐 물어볼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해외에 살다 보면 이름 때문에 겪는 곤혹스러운 일이 많다.


나는 체코 프라하에 살고 있다. 워킹홀리데이로 넘어와 1년만 살아 보자고 계획한 것이 어찌 어찌 1년씩 늘어 벌써 5년이 되었다. 5년 동안 내 이름이 제대로 불린 적은 손에 꼽는다. 이건 체코어의 발음 체계 때문이기도 한데, 체코어의 알파벳 j가 영어 알파벳 y와 비슷하게 발음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한국어의 “ㅈ”이 들어가는 이름이 여권상 “j”로 표기된다면 체코에서는 이를 “y”처럼 읽는다. 내 이름 OO주는 자연스레 OO유로 발음된다. 이걸 몰랐을 때는 관공서나 병원에서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다른 사람 이름을 부른 줄 알았다. 눈만 멀끔 멀끔 뜨다가 뒤늦게 내 이름이라는 걸 알아 차릴 때도 있다.


알파벳 때문에 새로운 이름이 생기는 것 쯤은 애교에 불과하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대뜸 영어 이름이 있냐고 물어 본 적이 있다. 이름이 뭐냐는 질문에 한국 이름을 이야기했더니 발음이 너무 어렵다며 영어 이름이 있냐고 묻는 것이다. 순간 어릴 적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만들었던 그 ‘영어 이름’을 말해줄까 하다가 멈추었다. 그간 살면서 내 정체성이 백인 위주의 세계관으로 곡해되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름 만큼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인이 영어 이름을 당연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의 본연의 이름이 아니라 영어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는 사고는 지극히 서구 사회 중심의 시각이다. 그 생각에 맞장구 쳐주고 싶지 않았다.



한편 일을 하면서 이메일을 주고 받다 보면 아시아권 동료들이 자신의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영어 이름을 적어 두는 경우를 봤다. 발음이 어렵거나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 같다는 이유로 편의상 영어 이름을 포함한 것이다. 그럴 때면 속에서 꿈틀하고 의문이 올라왔다. 영어 이름을 왜 써야 할까. 발음이 어렵다고 새로운 영어 이름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발음이 어렵다는 기준은 누구의 기준인가. 그들은 자신의 영어 이름을 진짜 이름처럼 받아 들이고 있을까. 한 번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는 한국인 동료였는데 이름을 설명해야 하고 발음을 알려 주어야 하는 번거로운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성씨만으로 본인을 소개하고 불리고 있었다. 그가 한 번은 작게 읖조렸다. 아니, 그럼 도요토옙스키는. 그 발음은 뭐 우리한테 쉽나. 그의 볼멘 소리는 단번에 이해되었다.


나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정보. 그렇기에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 중에 하나. 어쩌면 나는 이름을 시작으로 나의 정체성 지키기에 나섰는지도 모른다. ‘나’는 끊임없이 타인과 사회 속을 오가며 영향을 받는다.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도록 강요받기도 하고 원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순간도 있다. 이름 하나 제대로 불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 나의 취향, 성격, 외모, 직업, 가치관은 어떠할까. 은연 중에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타인과 사회의 기준에 맞춰 형성해 왔는지도 모른다. “네가 뭘 알아”라고 반문하다가 어느 날은 “내가 뭘 알아”하며 멍해지기도 한다. 나는 과연 나에 대해서 온전한가.


앞으로 영어 이름은 계속 가지지 않을 생각이다. 발음이 어렵다고 말하면 두 번 세 번 이름을 얘기해 줄 수 있다. 글쓰기도 계속 할 것이다. 왜 쓰느냐. 작가라도 될 거냐. 글쓰기가 돈이라도 벌어다주냐고 나를 포함한 누가 묻는대도 계속 쓸 것이다. 달리기도 계속 할 것이다. 그 밖에 많은 것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며, 가끔은 내가 왜 좋아하는지 물으며, 나도 모르는 나를 알아갈 생각이다. 그것이 세상과 나 그 사이에서 건강히 예의를 갖추는 방법이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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