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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Jan 18. 2022

라면먹고 갈래?

눈치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작업 멘트를 단번에 구리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작업 멘트야말로 비유와 은유의 꽃이요. 비유와 은유를 눈치껏 읽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나는 그 능력을 갖춘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이루어지지 못한 수많은 사랑이 있었고 머쓱해진 멘트들이 있었고 서먹해진 사이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 번은 성당에서 만난 오빠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 외롭지? 나는 이 말의 뜻을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쩌라는 거지. 그 오빠는 나랑 꽤 친분을 이어오던 사이였다. 우리는 그 당시 생긴지 얼마 안 된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자주 주고받았고 서로의 프로필 사진이 바뀌면 놀림을 섞어 관심을 보냈다. 서로를 놀리는 것은 괜히 시간이 나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내서라도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오빠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괜히 연인이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는데 그건 너무 간지러운 일이라서 천천히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밤이 새도록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런 날이 며칠 있고 그 오빠는 대뜸 내가 외롭냐고 물었다. 뜬금없었고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약이 올랐다. 내가 그와 연인이 되는 상상한 것을 잠깐 들킨 것 같아서 빨리 감추기 위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오빠는 너 외롭잖아 하고 추궁했다. 나는 약이 올랐다가 서서히 열이 받았다. 너가 나를 원하고 있는지 묻는 사람의 태도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있잖아. 나는 좀 외로운 거 같아,라고 스스로 운을 떼거나 요즘 나는 좀 누굴 만나고 싶어라고 말을 하던가. 대뜸 너는 외롭지 않냐고 묻는 사람은 마음을 고백하고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 숨는 비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발 물러서서 어라, 이거 작업 멘트인가 하는 눈치와 여유를 보였다면 나는 지금쯤 솔로 지옥의 프리지아처럼 나를 쫑쫑 쫓아오는 사람들에게 '가자 강아지'라고 말하며 마음을 훔치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을지...는 다음 생을 기약하자.


그 멘트가 작업 멘트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경우 혹은 아예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심지어 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같은 문화권 사람끼리도 그러는데 다른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보내는 신호가 선의가 담긴 친절인지 나를 여자친구로 삼고 싶다는 건지 도통 헷갈릴 때가 있다. 오죽하면 외국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이런 멘트는 조심하라며 경고를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넷플릭스 앤 칠(Netflix and Chill)이다. 우리 집에서 넷플릭스 보면서 쉴래? 번역하자면 이런 뜻인데 사실 진중하게 영화와 드라마를 시청하자는 의미보다는 좀 더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체코에 온 지 일 년이 넘어갈 때 도무지 늘지 않는 체코어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평생 아.... 어.... 하하 세 마디만 하면서 살아가겠구나 싶어 언어 교환 앱을 깔고 체코 사람과 채팅을 했다. 그때 몇 마디 나눴던,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어떤 남자가 내게 넷플릭스 앤 칠을 권했다. 당시 다행히 그 뜻을 알고 있어서 남자친구가 있다는 핑계 삼아 거절했던 기억이 있다. 놀라운 것은 내가 거절한 뒤 보인 남자의 태도였는데 그는 내가 남자친구가 있는지 몰랐다며 연신 사과를 했다. 그의 예의범절보다 넷플릭스 앤 칠이 정말 그런 의미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서 더 놀란 마음이었다.


체코에서는 흔한 작업 멘트로 'chces jit nahoru?'라는 말을 쓴다. 번역하면 '위로 올라갈래?' 이런 말이다. 뭐 홍콩 갈래? 이런 뜻은 아니고(생각만 해도 너무 구리다) 아파트 앞에서 헤어지기 직전의 두 사람이 우리 집으로 올라갈래? 올라가서 차 한잔할래? 같은 뜻으로 쓴다고 한다. 물론 말 그대로 집에 같이 올라갈 것을 동의하냐는 물음은 아니다. 집 안에서 두 사람이 가질 시간에 대한, 이 감정이 사적인 공간에서 폭발할, 아름답고 야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만난 체코 사람이자 내 단짝인 릴리 역시 썸을 탈 때 그런 말을 종종 들었다고 한다.


릴리는 내게 한국에서 '김치 먹고 갈래?'라고 하지 않냐며 물었다. 김치라니. 화들짝 놀란 나는 순간 김치를 먹은 두 사람이 마늘 향을 풍기며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 릴리도 이상함을 재빨리 감지하고 말을 고쳐 '아! 아니다 라면 먹고 갈래? 맞지?' 하고 다시 말했다. 나는 상상이 멈추지 않고 다시 라면을 먹은 두 사람이 진라면인지 신라면인지 혹은 불닭볶음면인지 모를 양념을 두 입술에 묻히고 서로를 유혹하는 상상을 했다. 너무 빨간 냄새가 나는 사랑이다. 그것이 작업 멘트가 되기까지 그 속에 숨은 은유와 비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실감했다. 눈치가 없는 나는 비유와 은유는 모조리 거두고 라면 국물 속 파 건더기가 이에 끼는 상상을 하며 손사래를 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습고 말도 안 되는 듯한 이런 작업 멘트들은 어떻게 그 자리를 찾아 두 사람의 사이를 엮어주는 것일까. 문득 그 마음이 궁금해졌다. 라면 먹고 가자는 말을 처음 뱉은 사람. 넷플릭스 보면서 우리 집에서 쉴래라는 말을 한 사람. 위로 올라가서 차 한잔할래 하고 물어본 사람. 그들은 그 말을 하며 어떤 용기를 냈을까. 그게 하나의 고백과 같았을까. 그 사이 네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은지 확인하려 했으려나. 사랑은 끊임없는 확인의 과정인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필요가 없어진 안정된 두 사람은 어떤 행복을 약속할 수 있을까. 그것은 덜 설레는 사랑의 지름길일까. 더 견고한 사랑의 지름길일까. 또 오만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각국의 연인들이 쏼라쏼라 사랑의 언어로 서로를 꼬시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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