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루주 May 04. 2022

19. 눈이 반짝이는 순간

눈이 반짝일 때를 사랑한다. 그때 열망한다. 그때를 기다리는 것은 아닌데 그 순간이 오면 살아있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한다. 그것을 사람들은 꿈꾸는 자의 눈이라고 한다. 살면서 가슴을 콩닥거리게 할 만큼 해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사람의 삶일지라도 그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게 만든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를 바닥까지 의심하게도 만든다. 내가 뭘. 이제 와서 뭘. 해봤자지 뭐. 그런 생각들은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꿈일랑 접고서 열망일랑 일찍 포기하고서 그것을 이룬답시고 큰 기회비용을 치를 뻔한 인생의 실수를 지혜롭게 예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주가 서서히 작아진다.


글쓰기를 멈추고 딱히 이루고 싶은 것이 없는 나날을 보냈다. 달리기를 열심히 했다. 달리기는 뭘 이루려고 뛰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이 좋아서 달렸다. 그럴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이상하게 속도나 거리보다도 뛰는 순간 내 기분이 유쾌해져서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고 나면 샤워하고 밥 먹고 한국어 수업을 하고 다시 그것을 반복하는 삶에 천천히 녹아들었다. 가끔은 그 하루들 사이에 어딘가 공허함을 느꼈다. 그때마다 한국에 안 간지 오래되었지, 엄마가 보고 싶은가, 가족들과 통화를 언제 했더라 하곤 그리움의 마음을 확인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사람과 장소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삶의 열망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살아가던 때.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던 때. 앞날을 그리 의심하지 않았던 때. 가능성을 믿고 덤비던 때. 그때들의 나는 어딘가로 흩어져 지금은 하루를 자분자분 살아가는 것일까.


이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늘 동료와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그의 이름은 '시니'다. 그는 나보다 일 년 반 정도 먼저 입사해 중국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시니는 옆광대가 도드라져서 웃을 때마다 얼굴이 하트 모양이 되는데 성격이 밝아 하루에도 오십 번 정도는 활짝 웃어서 얼굴에 한가득 하트를 띄우고 다닌다. 그 에너지에 나는 그만 반하고 말아 어떻게 서든 공통점을 찾아 나서고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니가 중국에 있을 시절 작가로 일을 했다고 말했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있는 사람에게 본인을 작가라고 소개하는 사람은 얼마나 매력적인지.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서 퇴근길에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시니는 중국에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글을 썼다. 그 글은 잡지에 실려 이리저리 팔렸는데 그렇게 살았던 것이 10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중국에 사는 외국인들을 인터뷰했다. 중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중국의 소수민족을 공부하는 한 체코 청년도 있었다. 시니와 체코 청년은 인터넷 공간에서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줌 미팅 룸을 켜고 서로의 얼굴을 컴퓨터 화면에서 마주하며 어색한 인사를 나눴을 것이다. 하트 모양 얼굴의 시니는 밝게 웃으며 질문을 요리조리 길잡이 삼아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화 후에 체코 청년은 시니에게 잡지를 보여달라고 말했다. 시니는 잡지가 나왔을 때 그 청년을 만났고 (...) 둘은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생략된 중간의 이야기는 시니와 더 친해지면 듣게 될 것이다. 


시니가 결혼하면서 체코로 올 때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간 쌓아온 경력을 두고 체코에서 다시 정착을 하리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몇 년 다니던 직장을 나와 이직을 한다 해도 고민이 큰데 살던 나라를 아예 옮겨 새로이 뿌리내리는 것은 만만치 않게 어렵다. 시니는 글을 쓰던 실력으로 번역일을 했지만 아무래도 고민이 있는 듯했다. 누구나 조금만 훈련받으면 어느 정도 기대되는 수준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 말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일, 나를 확장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니에게 그 일은 글쓰기였다. 글쓰기를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확장하고 나의 예술을 만드는 일. 그 일이 시니의 삶을 더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시니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의 글쓰기를 자진하여 열망했다. 제발 계속 써 주세요. 그것을 놓지 마세요. 물론 말과 행동이 앞서는 나는 그 열망의 마음을 말로 뱉었다. Keep writing! 그러며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글쓰기에 대한 꿈이 있고 이것을 좋아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시작한다 해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하는지, 이렇게 쓴다고 해서 책이 나올 수는 있는지, 이야기라고 하기에 일방적인 푸념에 가까웠지만 시니는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내게 말했다. Keep writing. 계속 써. 계속 쓰면 네가 썼던 것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게 될 거야. 우리는 서로의 블로그 주소를 주고받았다. 시니의 글이 가득 담긴 웹페이지를 훌훌 내려가며 그의 우주가 참으로 넓다고 생각했다. 


그가 쓴 글 사이를 유영하며 눈이 조금씩 맑아졌다. 내 눈에 이런 기운이 돌았던가. 다시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18.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