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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May 23. 2022

배우는 이의 언어

언어를 배울 때 좋아하지 않는 말이 있다. '일 년 만에 교포 되기, 언어 정복, 100일의 기적' 대강 이런 말들이다. 애초에 언어란 끊임없이 생겨나고 수정되며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언어를 완벽히 정복한다고 말할 수 없다. 설사 정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언어 능력에 관해서는 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치가 과연 어디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능력은 모국어의 영역에서도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서만 서서히 단련되기 때문이다. 제2언어와 제3언어를 학습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언어 능력을 향상하는 과정은 길고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이것은 단 며칠 사이에 갑자기 생기는 기적도 아니고 언젠가 정복할 수 있는 산도 아니다. 이 문구가 학습에 대한 동기를 유발하고 언어 공부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한다면 모르겠으나 중간 언어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이 문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중간 언어는 제2언어학습자 또는 외국언어학습자가 언어 학습 과정에서 만들어 사용하는 불안정한 상태의 목표 언어를 말한다. 이는 목표 언어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학습자에 따라 나타나는 개인적이고 특수한 언어체계이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 활동하는 방송인 타일러 라쉬는 이런 게시글을 올렸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우리가 자기 자신과 그 낯설게 느껴지는 언어 사이의 거리를 천천히 좁혀 나간다는 것이지, 언어와 경쟁하거나 그 언어를 소유하려는 거 아니죠. 그러려고 해도 안 될 게 언어니까요. (...) 사람이 외국어를 배우는데 실수를 많이 하고 엉뚱하고 매우 부자연스럽게 말할 때가 있죠? 그건 좋은 거래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못한다고 놀리거나 자신이 없어서 이럴 때 포기하지만, 사실은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과정을 무조건 *무조건* 거쳐야 한대요! 그 과정 중에 있으면 그게 너무나 잘하는 거래요! 심지어 그 말투를 가리키는 용어가 있대요. Interlanguage(중간 언어) 혹은 learner language(배우는 이의 언어)라고 부르네요."


실제로 한국어 수업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중간 언어로 말할 때를 자주 목격한다. 한 번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학생은 단어가 생각이 안 나면 우선 알고 있는 단어를 조합해서 시도해보는 모험심 강한 성향이었다. 학생은 비건 김치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 학생은 김치에 사용한 재료로 이것저것을 넣었다고 이야기하던 중 봄 양파를 넣었다고 했다. 


"봄 양파요?"


다시 한번 되묻자 학생은 영어로 봄 양파라고 하는 것을 넣었다고 말했다. 순간 영어에서 spring onion이라고 부르는 것을 한국에서는 파라고 부른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생각해보니 봄 양파의 어감이 참 아름다웠다. 


또 한 번은 중급 수준의 학생과 함께 이야기를 할 때였다. 그 학생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영어가 모국어지만 그 외에 스와힐리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체코어 등 최소 5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한국어로 말할 때 영어식 표현을 빌려 한국어로 번역하듯 말하곤 했다. 이를 테면 수업을 온라인으로 할지 혹은 방문하여 만나서 수업을 할지 정하던 중에 만나서 수업을 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네, 저는 행복할 거예요."


아마 영어의 I would be happy to... 를 빌려 한국어로 표현한 것 같은데 보통 한국 사람들이라면 이 상황에서 '만나서 수업했으면 좋겠어요' 혹은 '만나서 수업하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이 너무 맑은 얼굴로 '만나서 수업하면 저는 행복할 거예요'라고 말하니까 갑자기 말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만나서 수업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데... 무조건 만나서 수업을 해야겠다... 어떤 임무가 생긴 비장한 주인공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한편 영어와 비교했을 때 한국어에서 행복하다(happy)라는 단어를 좀 더 무거운 무게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배우는 이들의 언어는 그들이 어떤 모국어를 사용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떻게 말하고자 하는지에 따라 제각각 엉뚱하게 튀는 공처럼 이리저리 분산되며 언어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독특함을 보여준다. 배우는 도중 발생하는 작고 귀여운 실수라기보다 어쩌면 이것은 예술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이 중간 언어 시기를 거쳐 점점 원어민 화자처럼 말하게 된다. 이 예술을 직접 하고 있고 또 지켜볼 수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이 단 100일 만에 기적처럼 유창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실수 없이 어느 날 원어민으로 오해받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도 말해보고 저렇게도 말해보고 열심히 언어를 가지고 노는 날이 충분했으면 한다. 그 과정에 많은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지? 그 순간 우리의 우주는 언어와 함께 확장한다고 믿는다. 그동안 한 번도 말해보지 않은 방법으로 생각을 표현하고 연습한다. 나의 중간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는 소중한 경험이다. 이것이 오히려 기적 같은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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