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안의 공허한 말들을 좋아하지. 오늘은 끝났어.
간단히 말해서,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이며, 피곤한 삶이며,
유배당한 삶이기도 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어머니는 밝은 금색 톤의 인켈 전축을 좋아하셨다. 가족들의 출근과 등교를 도와 바쁘게 움직였던 이른 아침 시간을 지나 햇살과 그림자조차 느긋해지는 오전 10시쯤이면 레코드나 라디오를 틀었다. 커피를 마시거나 사부작사부작 집안일을 하시며 음악을 듣는 어머니와 그 곁에서 뒹굴뒹굴하던 나의 모습은 꽤나 어렸을 때의 기억임에도 따듯한 여운으로 내 곁에 머물러 있다. 그 때의 어머니는 트윈 폴리오(송창식, 윤형주로 이루어진 70년대 남성 포크 듀오), 양희은, 패티김, 비틀즈(The Beatles),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 등의 음악가를 좋아했다. 어머니의 취향대로 음악을 듣던 꼬마는 그렇게 포크 록, 팝을 자연스럽게 접했고 그 시절의 기억은 자라면서 다양한 음악을 찾아 듣는 열정의 자양분이 되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소위 ‘TV에 나오지 않는 가수’들을 좋아하게 되면서 언더그라운드 음악 씬(scene)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여러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고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사놓은 LP를 들으며 영역을 넓혀 가기도 했다. 그 시절의 나는 <동아기획*>이라는 레이블에 소속된 음악가들의 앨범이라면 주저 없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스무 살이 되면서부터 외국 밴드에 대한 관심이 급작스럽게 커졌다.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영국, 미국, 스웨덴, 아이슬란드, 캐나다, 일본 등의 밴드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들었다. 혼자 들어도 여럿이 들어도 음악은 언제나 공간과 기억을 뛰어넘는 힘이 있었다.
내가 골든 팝스(Golden Pops)라는 밴드와 유일한 EP <The Great Fictions(더 그레이트 픽션즈)>를 알게 된 것은 그들이 활동을 멈춘 직후였다. “Empty Words(엠티 워즈)”는 그 앨범의 타이틀곡이다. 음악을 듣자마자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처음 들으면서도 익숙하다고 느껴지는 멜로디와 함께 매력적인 보컬의 음색, 서로를 타고 넘나드는 개성 있는 악기들의 소리가 잔뜩 들어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향수로 가득해지는 순간이었다. ‘비틀즈, 제프 버클리(Jeff Buckley), 닐 영(Neil Young) 등 60년대와 90년대를 아울렀던 전설적인 뮤지션들에 대한 오마주!’라는 앨범 소개 글을 보았다. 골든 팝스는 2005년부터 홍대앞 라이브클럽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2006년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에 ‘숨은 고수’로 등장한다. 2007~2008년, 그들은 홍대앞 인디씬에서 주목받는 최고의 신인이었다.
*동아기획(1982년~1994년, 대표 김영) :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언더그라운드의 메카. 들국화와 시인과 촌장, 조동진과 김현식, 신촌블루스와 봄여름가을겨울, 한영애와 장필순, 김현철과 박학기, 푸른하늘과 빛과 소금 등 소위 말하는 동아기획 사단 뮤지션들이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지형도를 뒤바꿔 놓았다. - 출처 : 벅스 <뮤직포커스: 레이블을 알면 음악이 보인다>, 글: 이태훈
Every little time when I am strollin’ all day
There’s a little guy who someone talk about me
“You don't have much time in a loss, my friend”
내가 하루 종일 거닐고 있을 때마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은 남자가 있어
“잃어버릴 시간이 많지 않아, 친구”
I’ve been with a hot TV runs all day
The time is gonna tell me the truth about me
“Why do you wanna hide from yourself, my friend?”
하루 종일 뜨거운 TV 방송과 함께 했어
시간이 나에 대한 진실을 말해 줄 거야
“왜 숨고 싶니, 친구?”
골든 팝스를 대중에게 알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쌈싸페)’은 인디씬의 태동과 함께 세기말에 등장했던 음악 페스티벌이다. 1999년, 중견 의류업체 <쌈지>의 문화사업 지원으로 시작되었고 여타의 록 페스티벌과 달리 대중에게 인지도 높았던 밴드들은 라인업에서 제외됐다. 당시 쌈지 대표는 “실험적이고 독특한 음악세계를 추구하는 신예 음악가를 발굴하고 대중에게 다양하고 신선한 음악을 선사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라고 밝힌 바 있다.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입장료 무료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열여섯 팀의 공연을 올린 게 축제의 시작이었다. 이후 페스티벌 장소와 관련된 민원, 기업 부도 등 여러 가지 문제로 고전을 겪으면서도 2015년까지 이어졌던 쌈싸페는 대한민국에 록 페스티벌 문화를 정착시킨 ‘원조’ 토종 페스티벌이었다.
2001년, 2002년에 걸쳐 쌈싸페에 갔던 나는 마음이 활짝 열리고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던 세상에 커다랗고 새로운 문이 갑자기 등장해 우리들을 빨아들이는 기분이었다. 이 사회에 던질 수 있는 모든 질문과 이야기들이 다 모여 각자의 소리를 한껏 내는 듯 했고 옆에 서 있는 누구라도 나와 뜻을 함께 할 것 같았다. 일상을 벗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바라보게 만드는 힘, 페스티벌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깨달았던 순간이다. 처음 듣는 음악이 대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대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들이 데려가는 놀라운 세상으로 마음껏 유랑했고 음악이란, 예술이란 참 멋지구나 생각했었다.
I like the empty words in me. The day is done
I like the empty worlds in me. The day is done
I like the empty walls in me. My day is done
I like the empty wards in me.
나는 내 안의 공허한 말들을 좋아하지. 오늘은 끝났어
나는 내 안의 텅 빈 세상을 좋아한다. 오늘은 끝났어
나는 내 안의 텅 빈 벽을 좋아해. 나의 하루는 끝났어
나는 내 안의 텅 빈 병동이 좋아.
쌈싸페 이후 파란만장했던 페스티벌 춘추전국시대(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그랜드민트 페스티벌,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등)를 지나면서 소위 ‘모객’이 되는 비슷한 라인업에 타이틀만 다른 페스티벌이 우후죽순 생겼다. 지자체, 대기업, 문화예술 기획자 등 음악 페스티벌을 만드는 축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산업적 성과를 수익성이나 투자가치로만 보는 것은 기울어진 시선이 아닐까? 음악 생태계의 생산자이자 플레이어들인 음악가 입장에서 무대를 해석할 필요도 있다. 페스티벌은 음악가의 작업을 세상에 알리는 플랫폼으로 작동할 수 있으며 이는 그들의 브랜드 가치에 숨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나아가 생계를 해결하는데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티켓 가격을 높이는 유명 헤드라이너 섭외에만 집중하지 말고 음악 생태계가 함께 살아가는데 초점을 맞춘 페스티벌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2018년에 시작된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을 소개하고 싶다. “음악을 통해 정치, 경제, 이념을 초월하고 자유와 평화를 경험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피스트레인은 비상업적인 동시에 대중친화적인 뮤직 페스티벌을 목표로 헤드라이너 없는 페스티벌을 만들고 있다. 또한 유명 뮤지션보다 시대가 열망했던 음악, 새로운 음악적 발견을 선사한다는 취지 아래 국적, 장르, 성별, 세대를 넘어서는 다양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여러모로 반가운 소식이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새로운 음악을 만날 수 있을까? 오디션 혹은 서바이벌 프로그램, 공정성을 의심받는 순위제 음악 방송 등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프로그램은 매일 쏟아져 나온다. 그 많은 채널을 통해 소개되는 건 어떤 음악들인가?
위에서 언급되었던 <EBS 스페이스 공감>은 장르 편중이 심한 대중음악계에서 음악의 다양성을 담보했던 몇 안 되는 채널이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음악가들이 장르와 국적을 가리지 않는 무대에서 온전히 자신의 음악을 선보일 수 있었다. 2014년, 낮은 시청률과 예산 부족을 이유로 들며 방송 축소 논란이 불거졌을 때 이를 잠재우고자 7,700여명의 예술가들이 서명운동을 펼쳤던 것도 이 프로그램이 가진 의미가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 음악가들의 크루에 가까웠던 <동아기획>에서 내놓는 음반에 대한 믿음이 있었듯이 2000년대 초반의 나는 ‘쌈싸페’에 등장하는 음악가들의 음악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가사에 담긴 깊은 고민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 다양한 장르와 실험에 대한 모색 등이 그 안에 담겨 있었고 그 덕분에 나는 음악이란 정해진 길 없이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요즘 나는 <네이버 온스테이지>와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소개되는 음악가들을 눈여겨본다.
음악이 있는 우리의 삶, 좀 더 풍요롭고 넓은 사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다양하고 새로운 채널과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신화된 ‘즐거움’을 기반으로 상품성만 추구하는, 혹은 교환가치로서의 즐거움만 계량하는 페스티벌을 넘어 고유의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축제’들이 나타나길 바란다. 그리하여 음악 생산자들이 좀 더 나은 노동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골든 팝스(Golden Pops) | 호균(기타, 보컬), Jimvok(리드 기타), pL(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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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스페이스 공감 394회 - 2008 그들을 주목한다 : 다시보기
EP <The Great Fictions> : 앨범듣기
*<Empty Words>는 각종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67호(2023년 봄호)에 전게(前揭)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