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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오 분전 Jul 06. 2020

 <경국대전>과 윤석열 검찰 쿠데타

혁명과 역모 사이



경국대전
조선의 법전인 <經國大典>에는 '역모한 자는 삼족 멸문지화(三族滅門之禍)한다'라고 나와 있다. 서재필은 3명의 정승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조선의 손꼽히는 명문가인 달성 서 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13세에 별시문과에 장원했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했고 19세에 국가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구한말 최고의 젊은 엘리트였던 그는 20세에 김옥균,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에 참여하였으나 3일 만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역모
서재필의 죄명은 역모였다. 생부 서광효는 투옥되어 자결했고 생모 성주 이 씨는 노비가 되어 자결했다. 양부 서광하와 양모 광산 김 씨 그리고 친형 서재춘 부부와 이복형 서재형 부부는 자결했다. 남동생은 서재창은 참수됐고 남동생 서재우는 나이가 어려서 살아남았다. 출가한 누나와 어린 누이 서기석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도망쳐 평생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아내 광산 김 씨는 투옥돼 관기가 되자 음독자살했고 2살 먹은 아들은 굶어 죽었다. 서재필의 생가, 양가, 외가, 처가 등 4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망명지에서 그 소식을 들은  서재필은 가슴을 뜯으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한다. 역적으로 몰리면 멸문지화를 당하던 시절이 불과 백수십여 년 전 일이다.

독립운동가 서재필
비운의 서재필은 당대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근대화라는 시대적 사명에 운명을 던졌다.  무너져 가는 조선의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망명했지만  훗날 그 왕의 요청으로 다시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세우고 나라를 지키려 했다. 그 후 ‘추방’이라는 두 번째 버림을 받고서도 그는 식민지가 된 조국의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해방 후에는 귀국하여 사회적 혼란기 속에서도 정치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서재필은 당대에는 역적이었으나 역사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위인으로 기록되었다.

검찰의 '역모'
봉건시대의 ‘역모’가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민주공화국에서 ‘역모’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국민주권’에 개입하고 왜곡하여 선출 권력을 전복하려는 행위다.  '검찰 수사권'을  무기로 삼아 검찰이 자신들을 개혁하려는 법무장관 지명자에게 누명을 씌워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검찰개혁을 거부한 것은 명백한 '역모'다. 그 누명이  재판을 통해 거짓으로 밝혀지기 시작하고 역적모의가 실패하자 자복하기는커녕, 국민들의 주권행사인  ‘선거’에 개입하여 선출 권력을 뒤집으려는 2차 작전을 짰다면 이것 또한  명백한 '역적모의'다.

누명 vs 혁명
만일 이런 합리적 의심이 억울하다면 검찰은 스스로 나서서 더욱 엄정하고 공정하게 수사하여 자신들의 누명을 소명하고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반대로 떳떳하다면  ‘수사지휘권’의  ‘ 위법성’ 운운하며 정치적 ‘딜’을 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나서서 자신들의 집단행동이 반민주정권으로부터 검찰 독립을 지키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투쟁 선언>을 해야 할 것이다.

민주공화국
100여 년 전 서재필은 폐망하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가족을 잃었고, 역적으로 몰려 버림을 받았다.  2020년 대한민국의  검찰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사권을 휘두르고 여론을 조작하고,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인사권에 도전했다.  <經國大典> 시대였으면 진작에 끌려 나와 오살육시(五殺戮屍)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을 역적들이  버젓이 모여 앉아 세를 과시하고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을 보니  대한민국민주공화국이 맞기는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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