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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오 분전 Jan 13. 2021

 <공정하다는 착각 >과 <빠리의 택시운전사>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정치인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문장’이다. 한때는 가슴을 벅차게 하는 ‘구호’였지만 지금은 수구꼴통들은 물론 정신 나간 ‘진중권’과 진보의 대부 ‘홍세화’까지 나서서 정권을 까대는 조롱의 ‘문구’가 되어버렸다.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복합적이었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망쳐놓은 이 혼란의 시대에 국민들이 원하는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선거 전략으로서 잘 기획된 ‘정치구호’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슬로건이 ‘화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얼핏 들었다.

‘공정’이라는 신화
‘평등한 기회’, ‘공정한 경쟁’ “정의로운 분배“는 근대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말들이다. 평등한 인간의 탄생 이후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추구해야 할 이상적 지향이기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구현 가능하지 않았다.‘제도’와 ‘사상’의 측면에서 이러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19세기 부르주아에 반대했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 그리고 20세기 초, 반대 진영의 존 듀이 (John Dewey)로 대표되는 낭만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사회개혁의 방향으로서 주창되었지만 역시 실패했다.

‘정치’라는 현실
정치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제도이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라인홀트 니부어’ (Reinhold  Niebuhr)에 따르면 사회집단 간의 이기심과 욕망은 개인의 도덕성과는 구별되며 따라서 집단의 이기심은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합의와 조정으로 합의될 수 없다는 현실론에 근거한다. 정치가 추구하는 최고선은 이상적인 도덕이 아니라 정의라는 사회질서이다. 계층 간의 소득격차가 심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차별 없는 평등과 공정은 구현할 수 없는 목표다. 그렇기에 현실정치의 과제는 ‘불공정으로 인한 구성원 간의 이해충돌’이 폭발하지 않도록 제어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빈부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한 뼘이라도 넓히는 것이 ‘현실적인 공정’의 목적인 것이다.

‘조국’과 ‘윌리엄 싱어’
법무부장관 조국의 딸이 부모의 지위를  배경으로 입시에 특혜를 받았다는 논란이 발단이었다.  진보의 ‘위선’이라는 정치적 프레임이 덧붙여지면서  문재인 정권이 ‘공정’을 배신했다는 정권의 ‘도덕성’ 문제로 비화되었다.  ‘윌리엄 싱어’는 미국의 신흥 부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명문대 관계자를 매수하여 서류 조작을 통해 자녀들을 부정 합격시킨 전형적인 불법 입시 브로커다.  이 사건 역시 미국 민주당 지지 성향의 엘리트 학부모들의   ‘불법’과 ‘위선’이라는  프레임으로 공화당과 보수파들로부터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공정성’과 ‘능력주의’
미국과 한국에서 벌어진 입시부정을 둘러싼  계층 간의 갈등 표출, 사회적 공정성 논란, 진보와 보수의 정치공방은 단순한 사회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구조적으로 불공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공정’이라는 도덕적 ‘공공선’을  둘러싸고 벌어진 기만과 오해의 결과이다. 오랜 시간 억눌렸던 피해자들의 격한 분노의 산물이다.  구조적으로 편재된 불공정의 현실은 외면한 채, 재능과 노력에 기반한 능력주의가 정당하고 공정한 '성공'의 기준이라고 강조했던 '승자'들과 이를 의심치 않았던  '패자'들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의 < 공정하다는 착각>은 자본주의가 이러한 공정의 신화를 능력주의로 교묘하게 대체해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해왔음을 보여준다. 지난 수십 년간 자유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생산성이야 말로 ‘공정’와 ‘공평’과 같은 공공의 선을 구현하는 도구이고 성공은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체계라는 성공신화가 윤리적 우위를 유지해왔다. 결국 이러한 기득권을 강화하고 차별을 정당화시킨 지배 엘리트들의  관료주의와 오만함이 지금의 세계적인 정치 사회적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책은 재능과 노력으로  차별을  자연화시키는 '능력주의'와  이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공정'이라는 ‘가치'를 우리 사회의 ‘승자’들이 어떤 식으로  '신념화'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를 고백하고 있다. 결국 도덕적으로, 능력적으로, 정당하게 승복당한 ‘패자’들의 굴욕과 억눌렸던 분노가 마침내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폭발한 것이다.

<택시기사 홍세화>
그런 면에서 홍세화 류의 급진좌파들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은 정반대의 편에서 ‘공정성’을 이용한다. ‘공정’을 능력주의로 포장한 것이 ‘자본주의 성공신화’라면 ‘공정’을 손에 잡히는 실현 가능한 현실태로 과장한 것이 ‘좌파 포퓰리즘’이다. 홍세화는 ‘공정’을 정치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문재인 정권을 “내용은 없고 수사만 있는 정부”라고 비난한다. 최저임금, 부동산 문제, 중대재해 법에 대한 미흡함을 언급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정치 지도자로서의 책임윤리가 없다. 그러고도 모른 척하고 있으니 대통령이 아니라 임금님 같다.”라고 했다. “특히 조국 사태를 보면서 윤리적 우월성이라는 것이 없으며 수구세력과 다를 바가 없다”라고 했다. 홍세화의 냉혹한 비판은  하얀 도화지 같은 자신의 진보 순결주의를 확인하는 것일 뿐, 현실정치 속에서  구현 가능한 ‘현실적 공정’과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으로서의 ‘도덕적 공정’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혼란스러운 지금, 빈부격차와 사회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  지구적으로는 인종, 종교, 성별, 국가 간의 갈등이 심각하다. 트럼프의 포퓰리즘이 마침내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인 의회를 공격했다.  이 혼란의 시대에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따끈하고 시의적절하다. 본질적이고 명쾌하다. 재미있고 성찰적이다. 구조의 문제를 꿰뚫어 주는 ‘지식인의 역할’을 보여준다.   한국의 지식인들을 생각한다.  입만 열면 오만과 편견과 특권의식에 빠져있는 엘리트주의자들, 정치권의 대변인이 되어 사회의 혼란과 분열만 조장하는 정치 지식인들, 그리고 이상적인 사회를 주장하며 구름 위에 앉아서 훈수만 두고 있는 진보 원칙주의자들.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가당착과 비현실적인 불평불만은 결국 ‘현실적 공정’을 위해 애쓰는 현실정치와 시민들의 노력을 냉소하고 무기력하게 만들며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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