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끄덕일 때 혼자 끄덕일 수 없는 자의 비애
모두가 끄덕일 때 혼자 끄덕일 수 없는 자의 비애를 수필평론가 양성과정 강의를 들을 때 자주 느낀다. 수업 중 수강생들이 무언가에 동의하며 단체로 고개를 끄덕일 때, 나는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멍하니 눈만 껌뻑였다. 이런 내가 평론가 양성과정을 수강한다니, 언감생심이라는 사자성어를 들이대며 비웃어도 할 말이 없다. 비록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이 많지만, 나는 강의 시간이 즐겁다. 지금까지 '극이과형' 집단 속에서 살아온 내게 이곳은 신세계를 구경하듯 재미있다. 다른 물리법칙이 존재하는 새로운 우주를 엿보는 기분이랄까?
그날은 에피파니(Epiphany)라는 단어가 나왔다. 제임스 조이스 소설,《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평론한 수강생 글을 합평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나타난 새의 상징과 에피파니에 대해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글쓴이의 설명을 들으며 대부분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끄덕일 수 없었다. 에피파니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에피파니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 홀로 작은 섬 안에 고립된 기분이 들었다. 캄캄한 밤, 섬에 낙오된 나는 에피파니를 아는 자들이 사는 저 육지 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다.
다급한 마음에 스마트폰으로 네이버 검색창을 긴급 호출했다. 에피파니가 뭣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에피파니 치과', '에피파니 헤어살롱', '에피파니 한복', '에피파니 연구소', '에피파니 앱' 외에도 무엇을 하는 업체인지, 도대체 어떤 물건인지 알 수 없는 다수의 에피파니들이 스마트폰의 작은 창에 떠올랐다. 에피파니는 상표나 상호가 될 정도로 흔한 단어였나? 그런데 왜 나는 처음 들어봤을까? 온갖 에피파니들을 스크롤하며 아래로 내려가 보니 어학 사전에선 에피파니를 '공현 대축일(1월 6일, 기독교에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러 베들레헴을 찾은 것을 기리는 축일)'로 설명하고 있었다. 정신이 더 멍해졌다. 공현 대축일라니…. 머릿속에선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 에피파니, 동방 박사가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둥둥 떠다녔다.
"여기서 에피파니는 따로 쓰시고…. 새의 상징은…."
교수님의 비평이 시작되자 수강생들은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을 들어 에피파니가 무엇인지 질문을 해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했다. 에피파니란 단어를 언급한 지 한참 되었는데, 갑자기 에피파니를 물으면 이상하겠지? 에피파니를 다 알고 있다는 전제로 진행되는 꽤 진지한 강의인데 내가 흐름을 깨는 것은 아닐까? 사실, 질문을 할 수 없는 솔직한 이유는 강의실에 계신 어르신 수강생들(내가 제일 어렸다)이 어려워 그들 앞에서 뭔가를 말하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발표 공포증이 있어, 격식 있는 자리나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강의가 끝났다. 무거운 마음으로 일어나 회식 자리로 갔다. 수강생 중 평론으로 등단하는 분이 있어 가벼운 등단파티를 겸한 자리였다. 나는 같은 테이블에 앉은 분들께 넌지시 에피파니가 뭐예요, 라고 물었지만 등단파티 기념으로 나온 맛깔스러운 낙지볶음과 녹두전, 그리고 달착지근한 모히토 칵테일에 묻혀 내 질문은 슬그머니 증발해 사라졌다. 에피파니를 아는 분들 사이에서 나는 모히토 잔을 쭉 들이켰다. 술이 달았다. 그래서 에피파니는 알지만, 음주의 기쁨은 모르는 분들이 남긴 모히토를 모두 수거해 다 홀짝 마셔버렸다.
집에 돌아와 모히토에 의해 의기가 충만해져서 에피파니를 부숴버리겠다는 각오로 폭풍 검색에 들어갔다. 지식백과, 뉴스 기사, 지식인, 어학 사전, 블로그, 네이버캐스트를 뒤졌다. 어학 사전에서 에피파니는 여러 의미가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나온 설명이 '(어떤 사물이나 본질에 대한) 직관, 통찰'이었다. 이 뜻인가? 그런데 문학에서 '직관, 통찰'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산 넘어 산이었다. 이해가 될 때까지 검색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계속 찾다 보니 신문 기사에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피파니를 언급한 내용을 발견했다. 어, 그런데 이게 어째 익숙한 문구였다. 생각해보니 내가 읽은 책 속 내용이었다. 그것도 최근에 읽은 책.
그 책을 찾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찾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어디에 둔 건지…. 거실, 서재, 아들 방까지 다 찾아다녔다. 서재 책상 뒤쪽에 있는 책장 아래, 세로로 꽂힌 책들 위, 조용히 숨어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발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혼돈의 세계 같은 책장 속에서 나는 같은 책들을 여럿 발견했고(있는지 모르고 또 구매함), 처음 보는 책들도 발견했으며(사놓고 잊어버림), 뒤죽박죽 놓여 있는 책들을 보면서 점점 뒷골이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혈압이 최고조로 올라가려는 순간, 간신히 찾아낸 그 책에서 드디어 에피파니를 건져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그때의 감각을 나는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하늘에서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기분이었습니다……(중략)……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顯現'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45쪽~46쪽-
책 속 에피파니 부분엔 파란색 줄이 가지런히 그어있었다.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라 얼마 전에 내가 직접 힘을 주어 그어 놓은 줄이었다. 파란 줄을 보자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에피파니 때문에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루를 보냈는데, 처음 들은 단어가 아니었다니! 관객이 없는 공연장에서 혼자 원맨쇼를 하고 난 기분이었다. 나쁜 머리를 탓해야 하나. 나에 대한 신뢰는 저 아래로 추락해버렸고, 그 빈자리에선 나를 책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허탈한 마음으로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아무 맥락도 없이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에피파니를 소재로 수필을 써야겠어’ 라고. 돌연 눈앞에 쓱 나타난 글쓰기의 욕구.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다. 나는 확실하게 그것을 느꼈다. 그 감각은 천장에서 하늘하늘 내려왔고 나는 두 팔로 멋지게 받아 안았다. 그렇게 나는 에피파니 유사품을 꼭 안고 그날을 위로받으며 기분 좋게 잠이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