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것은 공중에 떠 있는 돌이었다. 열아홉 나는 책상에 앉아 화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보름달이 유난히 맑은 여름밤, 카세트 플레이어에선 비치보이스The Beach Boys의 <Surfer Moon>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기체반응의 법칙에 관한 간단한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속눈썹이 풍성해지고 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속눈썹이 풍성해지고 길어진다’라는 문장이 느닷없이 떠올랐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그 낯선 문장에 갸우뚱거리며 고개를 드니 열어 놓은 창밖으로 돌이 보였다.
골프공보다 조금 크고 납작한 돌. 그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짱돌’이었다. 물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돌은 허공에 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돌을 발견한 내 눈이 동그랗게 커지자 그것은 이제 시작할 수 있겠어, 라고 말하듯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쪽으로 움직였다. 일정한 속력으로 서서히. 돌의 움직임은 주변 공기의 흐름과 무관해 보였다. 나를 포함한 방과 창밖의 풍경 위에 겹쳐 있는 다른 차원의 영상 같았다. 그렇게 천천히 상승한 돌은 잠시 후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중력을 거부하는 돌. 나는 그 돌을 이렇게 부른다. 멋지지 않은가? 중력을 거부할 수 있다니! 단단히 ‘빈정 상한’ 무엇이 수시로 명치 끝에서 꿀렁꿀렁 느껴지는 늦은 사춘기, 또는 고3병을 앓고 있던 나에게 그 돌은 하늘을 나는 슈퍼맨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슈퍼맨은 행성 크립톤에서 온 외계인으로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는 그의 에너지는 지구와는 무관한, 먼 외계의 것이다. 그리고 누가 봐도 그의 외모(슈퍼맨 유니폼을 입은 외모)는 ‘지금 당장 날아갈’ 태세임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골적인 것은 매력 없다.
하지만 그 돌은 지구의 것이다. 지구 표면 기반암에서 떨어져 나와, 수억의 긴 시간 동안 서서히 풍화, 침식되어 작게 깨진, ‘지금 당장 날아갈’ 태세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발치에 흔히 차이는 그런 돌멩이. 그 평범한 돌이 갑자기 중력을 무시하고 지표면 위를 유영한다고 생각해보라. 열아홉 나의 세상에서 그것은 가장 막강한 형태의 반항이었다. 돌이 지구의 중력을 향해 한 방 날린 것이다.
책상 의자가 자석의 N극이라면 나의 엉덩이는 자석의 S극이 되어 늘 붙어 있어야만 했던, 가장 강력한 중력의 지배를 당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그 돌은 통쾌한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훗, 나는 중력 따위는 모른다고!’ 라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돌은 땅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바둥거리는 지표면의 사물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언제 처음 움직이는 돌에 관한 이미지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속눈썹이 풍성해지고 길어진다’는 것이 그저 의미 없이 떠오른 문장인지 아니면 진짜 내가 느꼈던 감정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장면은 고3 여름 어느 날 떠올라 점점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기억 속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덧붙이며 단단하게 굳어졌다. 단단하게 굳어진 돌의 모습은 진짜처럼 느껴졌다. 중력을 거부하는 돌, 관성에 젖어 무기력한 일상을 뚫고 날아오르는 돌.
몇 년 전 심보선 시인의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서 <찬란하지 않은 돌>이란 시를 발견하고 놀랐다. 시에 등장하는 ‘찬란하지 않은 돌’이 내 기억에 저장된 ‘중력을 거부하는 돌’과 닮아 보였다.
그러니 우리는 쓸 수밖에 없다/발치에 구르는 찬란하지 않은 돌 하나를/눈앞에 치켜들고/그것이 스스로 파르르 떨릴 때까지
심보선, <찬란하지 않은 돌> 중에서
시인의 돌과 나의 돌은 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변하는 홀로그램처럼 중첩되어 보이기도 하고 따로 분리되어 보이기도 한다. 시인은 그의 언어로 발치의 흔한 돌을 스스로 떨리게 한다. 나의 돌은 무엇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시인의 돌과 같은 동력으로 날아오르기를 바라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바람일 뿐이다. 나의 언어는 아직 미숙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내 주변만 헤매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약 삼십 년이 흐른 지금도 나의 돌은 여전히 고3 내 방에 머물러 있다. ‘창밖에 떠 있다.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올라간다. 더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전부다. 돌은 내 기억 안에서 공중 부양한 채로 뫼비우스 띠와 같은 궤도를 계속 돌고 있을 뿐이다.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떠올랐으나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돌, 고여 있는 시공간 속에서 무한 반복 중인 돌.
그 돌을 기억 밖으로 불러내고 싶다. 내가 쓴 문장이, 나의 글이, 돌의 에너지가 되어주길 소망한다. 추진력을 얻은 돌이 뫼비우스 띠를 끊은 후,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 대기권을 뚫고, 달을 스쳐지나 붉은 화성을 구경한 후, 목성의 거대함과 토성의 화려한 고리에도 기죽지 않은 채 멀리, 멀리 태양계 밖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어떤 중력장 안에서도 거뜬히 유영하기를……
그러니 나는 쓸 수밖에 없다! 그 돌이 파르르 떨며 지구 밖으로 날아오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