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커피를 마시는데 오늘은 마시지 않고 나왔으니 한 잔 하자는 핑계로 중학교 때 그 자리에 아직 남아있는 아이스크림가게에 와서 커피를 시켰다. 세상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빨리 바뀌는 듯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묵묵히 제 모습을 지키고 있어 준다.
누구나 그렇듯 나의 중학생 시절은 가능성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지금도 가능성은 충만하다. 그러나 이제 현실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건 지났다고 생각한다. 가진 게 없는 와중에도 시간은 오롯이 내 것이어서, 어떤 일을 해서 얻는 것과 걸리는 시간을 자꾸 견줘보게 된다)
우리 엄마는 아직까지도 종종 내가 새벽에 시험공부를 이어가기 위해 잠을 깬답시고 찬물을 몸에 막 끼얹었던 일, 방문을 닫아놓고 누군가에게 공부한 내용을 가르치듯 연기(?)하던 일, 시중에 나온 문제집을 다 사길래 욕심부린다 싶었는데 그걸 세 번씩 풀고 또 풀고서 시험을 보러 가던 일 등을 이야기하신다.*
지금 이때 받은 성적 덕을 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맡은 일이 너무 벅차게 느껴지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책임감 있게 단계별로 일을 헤쳐나가는 힘은 이 시기에 시험을 위해서 계획을 세워 공부하고 학교 생활을 성실히 하면서 쌓아 올린 성실함과 책임감에서 나오는 것이 확실하다.
공부를 왜 해야 할까? 성실함과 책임감을 배우기 위해서 일까?
UNDP에서 만든 교육용 보드게임에 따르면 교육받는 이유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라고 한다. 굉장히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다.
한편, 내가 대학 시절 교육철학을 전공하신 교수님께 배운 대로라면 공부는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배우기 위해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공부를 통해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큰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작은 세부 계획으로 나누고, 위기가 닥쳐와도 계획한 대로 적절히 인내하면서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를 체득한다는 뜻이다.
앞서 쓴 내용들은 다른 것도 아니고 왜 공부를..?이라고 묻는다면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무엇이 좋은가?"에 대한 답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가 힘든 순간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지금 보면 별 것 아니지만 그땐 별 것이었던 공부를 열심히 해 준 청소년 오찬우에게 고맙다.
그 시절 오찬우가 강한 책임감과 어려운 일도 견뎌내면 극복할 수 있다는 경험을 쌓아준 덕분에, 나는 '아아 귀찮다~' 소리치고 뒹굴거리면서도 아침에 꼬박꼬박 잘 일어나서 샤워하고, 양말 찾아서 신고, 가방 들쳐 매고,언제 귀찮다 그랬냐는 듯 그날 하루 루틴을 머릿속에 돌리면서 지하철역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어른이 되었다.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는 일을 만나도 3초 쫄고 이내 정신 차려 일을 착착 해결해 나가는 굳센 어른이 되었다.
*업데이트가 되면 좋으련만... 그때부터 나름대로 꾸준히 열심히 공부하며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10년이 훌쩍 넘어가도록 업데이트가 안 된다.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랑 관련해서 기억나는 게 있는지 여쭤봤더니 고등학교 때 내가 수행평가에 들어가는 숙제를 덜했다며 답지를 베껴가던 걸 보고 마음이 아프셨단다. ... 엄마 딸은 현실에 적응하며 잘 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