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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Jul 23. 2023

1화. 박은선은 12년을 기다렸다

*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을 앞두고 다음 뉴스펀딩에 게재한 글.


 열여덟. 박은선이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던 나이다. 축구를 시작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한국 여자축구의 희망’,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 등의 찬사가 그녀의 이름 앞에 따라붙었다. 박은선은 월드컵 예선 격으로 열린 2003 AFC 여자선수권대회에서 7골을 넣으며 한국 여자축구 최초의 월드컵 출전을 이끌었고, 2003 FIFA 미국 여자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그리고 2015년. 우리 나이로 서른이 된 박은선이 두 번째 월드컵, 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에 나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2년을 지나 다시 세계 무대의 문을 두드린다. 지난해 열린 2014 AFC 여자아시안컵으로 9년 만에 다시 태극마크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 후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애 첫 월드컵, 세계 무대의 벽을 실감하다


 박은선은 이번 월드컵이 더 특별할 수밖에 없다. 12년 전 월드컵에서 쓸쓸히 돌아섰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열여덟 박은선은 당시 세계의 벽을 확실히 느꼈다.


 박은선의 등장은 한국 여자축구에 충격이자 축복이었다. 좋은 체격과 재능을 고루 갖춘 박은선은 비교적 늦은 중학교 1학년부터 축구를 시작했지만 급속도로 성장했다.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팀에 발탁돼 당시 최연소 A매치 출전 기록(16살 6개월)을 세워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월드컵의 벽은 높았다. 한국은 2003년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3전 전패, 1득점 11실점으로 탈락했다.


 “잔뜩 얼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나왔죠. 장렬히(?) 굴욕을 당했어요(웃음).”  박은선은 3경기에 모두 출전했지만 골을 기록하진 못했다. 박은선 개인의 실력문제는 아니었다. 한국 여자축구의 현실이 그랬다. 당시 대표팀을 지도했던 안종관 (현 경신고)감독은 “그때의 한국 여자축구의 저변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고, 선수층도 얇았습니다. 세계와 겨루기에는 실력과 경험이 부족했던 거죠”라고 말했다.


 박은선은 월드컵의 굴욕을 약으로 썼다. 이후 박은선은 성인 대표팀과 U-19 대표팀을 오가며 아시아 정상급 활약을 펼쳤다. 2004 AFC U-19 여자챔피언십에서는 중국과의 결승전 해트트릭을 포함해 총 8골을 넣으며 한국에 우승컵을 안겼고, 득점왕과 최우수선수상을 차지했다. 사춘기를 막 넘긴 축구소녀에게 전국민적인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지금은 주춤거리고 있지만 당시에는 가장 촉망받던 박주영과 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 ‘여자 박주영’이라는 별명은 큰 칭찬이었다.


 최고의 자리에서 방황이 시작되다


 상승과 성공만 있었다면 박은선의 두 번째 월드컵은 간절함이 덜했을 수도 있다. 박은선은 시련을 겪고, 방황도 했다. 박은선 인생의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절박함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2005년, 박은선은 FIFA 올해의 선수 여자부문 후보에 오를 만큼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이런 좋은 흐름에서, 이제 막 성인이 된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어려운 집안 형편을 돕고자 대학 대신 실업팀을 택한 것이 문제가 됐다. 서울시청에 입단한 박은선에게 한국여자축구연맹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선수들은 대학에 입학해 2년 간 뛰어야 한다는 선수선발 조항을 어겼다는 이유로 연맹 주관 3개 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내렸다.


 충격은 컸고, 긴 방황이 시작됐다. 박은선은 2006년 대표팀 훈련 도중 숙소를 무단 이탈했고, 이로 인해 6개월의 출전 정지와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다. 2007년 1월 징계가 풀린 후에도 박은선의 방황은 멈출 줄 몰랐다. 소속팀 서울시청에서의 이탈과 복귀가 꼬리를 물며 반복됐다. 축구계에서 받은 상처, 아버지의 투병과 소천 등 개인사가 얽힌 결과였다. 여자축구의 희망이었던 그녀의 축구 인생은 점점 내리막을 향하는 듯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던 녀석이에요. 걔한테 연락 올 때가 제일 겁나요.”


 고등학교 때부터 박은선을 지켜봐 온 서정호 서울시청 감독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방황하는 제자를 지켜보는 마음은 오죽했을까? “마지막으로 들어온 게 2011년 말이에요. 2012년부터 다시 운동하기 시작했는데 조금씩 달라진 게 보이더라고요.” 서 감독은 제자를 다시 믿어줬다. 박은선은 공백만큼 떨어진 기량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2012년 WK리그에서 10골로 득점 2위에 올랐다. 2013년에는 19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고, 서울시청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박은선에게 가혹하게도 또 한 번 시련이 찾아왔다. 2013년 말 서울시청을 제외한 WK리그 팀 감독들이 박은선의 성별에 의문을 제기하며 성별 검사를 요구한 것이다. 당시 박은선은 SNS를 통해 “절 모르는 분들도 아니고 저한테 웃으면서 인사해 주시고 걱정해 주셨던 분들이 이렇게 저를 죽이려고 드는 게, 제가 고등학교 졸업 후 실업팀 왔을 때와 비슷한 상황 같아서 더 마음이 아프네요”라며 아픈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박은선에게는 다시 언급하고 싶지도 않은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박은선은 꿋꿋이 운동에 전념했고 2014년 5월 다시 대표팀에 발탁됐다. 소집 당시 박은선은 4년 만에 다시 단 태극마크를 만지며 “더 무겁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박은선은 2014년 아시안컵에서 6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한국은 4위로 두 번째 월드컵 출전권을 따냈다. 이후 7월 박은선은 러시아의 로시얀카로 이적하며 WK리그를 떠났다.


 단단해진 박은선과 강한 동료들


 “단단해질 수밖에 없죠. 단단해지지 않으면 이상한 거죠.”


 박은선은 이제 지난 시련과 방황의 결과를 웃으며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다. “어렸을 땐 멋모르고 방황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 있고 좋아도 참아야 하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이제 서른이잖아요. 스스로 책임져야 할 나이예요.” 생애 첫 월드컵 무대에서 덜덜 떨었던 10대 소녀는 이만큼 단단해졌다. 시련과 방황의 연속이었던 12년의 세월을 지나 두 번째 월드컵 무대 앞에 섰다. 그녀는 자신감에 차 있다. 박은선은 “이왕이면 목표도 큰 게 좋아요. 1승과 16강, 그다음에는 우승이 목표”라고 말했다.


 박은선의 목표는 허황된 꿈이 아니다. 박은선은 이제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를 도울 수 있는 능력 있는 동료들이 많다. 일본 무대를 평정하고 잉글랜드에 진출해서 기량을 뽐내고 있는 ‘지메시’ 지소연과 중원의 핵 조소현 그리고 단단한 수비를 펼치는 심서연, 임선주 등이 박은선을 돕는다. 오랫동안 여자축구를 지켜본 김대길 대한풋살연맹회장(KBSN 해설위원)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8강 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승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박은선, 지소연이라는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가 있고, 그 뒤를 받치는 선수들도 훌륭합니다”라고 했다.


 박은선과 대표선수들이 바라는 우승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가능성을 예상하기도 어려운 과제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도 확실한 게 하나 있다. 한국 여자축구는 늘 박은선을 필요로 했다. 2003년 월드컵 이후 1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박은선은 한국 여자축구의 희망이다. 좋은 성적을 기대해도 될 것 같다. 한국 여자축구의 희망은 박은선 한 사람이 아니다. 성숙한 박은선은 강한 동료들과 12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재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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