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님과 공주님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동화 속 공주님들은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결혼하고, 그 이후의 삶은 그저 "평생 행복하게 살았다"는 세 단어로 요약되고 만다.
작년, 20대의 마지막에서, 그리고 인생을 통틀어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순간인 결혼을 했다. 그리고 정말 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사랑하는 가족들이 두 배가 되면 행복은 두 배보다 훨씬 크고 깊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전의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고 기쁘게 느껴진다는 것. 모든 것이 결혼의 행복이었다. 마치 동화처럼.
하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평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13살 6년 줄반장, 14살 반배치고사 1등으로 중학교 입학, 17살 외고 입학 후 전교 순위권 유지.
20살 꿈꾸던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25살 자칭 '신의 직장' 공기업 입사, 29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
10대에는 별 것 아니지만 한 단계씩 나아갔고, 20대에는 감사하게도 노력과 성취를 경험했다. 평범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특별했고, 최고는 아니더라도 스스로는 만족스럽고 뿌듯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도저히 답을 내리지 못하는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지?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무사히 이뤄내고 평온하고 안정적인 일상이 찾아오자, 이제 어떻게 삶을 채워가고 그려가야 할지 막막함이 찾아왔다.
회사에서 노력한 만큼 인정받기 어렵고 생각보다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 주변 친구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만 뒤쳐지는 것 같은 불안함, 그럼에도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게으르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 여러 마음이 복합적으로 들면서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시도하기 시작했다.
내 삶을 담은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브런치에 글을 쓰고 글쓰기와 관련된 책을 읽었다.
미친 듯이 솟구치는 부동산 시장을 보면서 내 집 마련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부동산 강의를 듣고 임장을 다녔다.
회사를 언제든지 옮길 수 있도록 스펙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에, 대학원을 찾아보고 입시 공부를 위해 책을 샀다.
하루하루 성장하는 남편의 사업을 보면서 (물론 남편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제일 컸지만) 나도 같이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에, 손익계산과 기업가치평가를 도와주면서 CFO를 꿈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오래가지 못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어떤 주제로, 누구를 독자층으로 삼을지 갈팡질팡했고,한겨울에 주말마다 12시간씩 걸어 다니며 임장을 다녔지만 발목의 시큰한 통증을 얻고 현타를 맞았다.회사에서 시달린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기력 앞에서 대학원 준비 서적에는 먼지만 쌓였고,이미 가물가물 흐릿해진 대학교의 경영학 지식은 현실의 다채로운 문제들 앞에서 나의 무능력함을 드러낼 뿐이었다.
어느 것 하나 번듯하게 해내지 못하고, 잘하고 싶다고 말만 하면서 막상 잘하기 위한 노력은 힘들다며 포기하고,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진득하게 노력하는 의지는 하루만에 사그라드는 것을 보면서, 행복하지 않았다.
결혼한다고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니구나, 결혼만으로 나의 평생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구나.
동화 속 결말은 한 줄로 끝나지만, 내 삶은 이제야 시작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놀랍게도 이 깨달음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 아니었다.
20살 대학에 입학했을 때, 드디어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부터 진짜 자신만의 공부가 시작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25살 회사에 입사했을 때, 이번에야말로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부터 책 속의 공부가 아니라 현실 속의 공부가 시작된다는 사실에 또 충격을 받았다.
목표를 달성하거나 새로운 삶의 변화를 맞는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새로운 시작임을 그토록 뼈에 사무치게 느꼈었는데, 또다시 잊어버렸던 것이다.
29살 결혼식을 올렸을 때, 이제 내 삶은 행복과 안정과 반짝거림으로 가득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삶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삶의 뚜렷한 목적과 방향을 갖고 일관되게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대단하게 느껴진다. 욕심이 많아서 선택과 집중을 못하고, 한편으로는 어느 것 하나 진득하게 해내는 간절함과 의지가 없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삶을 다양하게 채울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 그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도 좋지만, 그 방향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이것저것 두드려보는 것도 현재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는 의미 있는 도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과정 자체만으로도 행복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읽는 브런치 작가가 되지 못해도,
내 집 마련은 물론 재테크까지 성공하는 멋진 다주택자가 되지 못해도,
회사에서 성취감을 느끼거나 인정받지 못해도,
석사와 박사라는 타이틀을 갖지 못해도,
전공을 살려 남편의 사업에 크게 기여하는 유능한 아내가 되지 못해도,
좋아하는 글을 쓰고 부동산과 재테크에 관심을 갖고 회사에서 최선을 다하며 스스로 성장을 위한 공부를 놓지 않고 정서적으로 남편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아내가 된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행복이지 않을까.
이렇게 결혼 이후의 삶을 채운다면, 이것이야말로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