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하고도 즐거운 경험
드디어 <엑시트>를 만났다.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보면서 오랜만에 진심으로 즐겁다고 느꼈다.
다 보고 나서 오랜만에 아 좋은 영화는 이런 거지, CJ도 이런 거 할 줄 아는구나, 흐름은 바뀌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좋았고. 이상근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2000년대에 단편 영화제에서 수상한 기록들이 있으신데 첫 장편작이다.
기존의 대규모 자본으로 만들어진 상업영화들에 대한 기대치라는 것이 있다. 평소보다 높은 기대를 가지고 갔음에도 <엑시트>는 기대 이상이었다. 아래는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에 대한 이야기다.
1. 제일 마음에 드는 점은 뚜렷하게 커다란 한 가지의 사건만 다룬다는 점이다.
<어쩌다 결혼> 때도 마음에 드는 이유로 같은 이유를 들었었다. 2시간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다. 욕심으로 큰 가닥에 자꾸 자잘한 이야기를 덧대다 보면 산만해지기 쉽다. 그러다 보니 말도 안 되게 길어지는 영화들도 많고. 그런 영화일수록 만족스럽기는 쉽지 않다.
또 다른 예로 <기생충>이 좋았던 이유는 그런 자잘한 이야기까지도 다 잘 다뤘기 때문이었다. 이는 봉준호니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엑시트>는 정말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가스테러가 있었다 -> 암벽 등반을 할 줄 아는 두 사람이 탈출한다. 이 한 줄로 정리된다. 다른 갈래들은 필요 없다. '탈출'하는 걸 보여주는 걸로 충분하기 때문에 '테러범이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같은 사연은 짧게 한 줄로만 지나가기만 하면 충분하다. 실제로 <엑시트>가 그런 식이고.
개인적으로 긴 영화보다 콤팩트한 러닝타임의 영화를 만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100분 정도의 영화가 누구나 집중해서 즐겁게 보기 딱 좋다고 생각되고. 시간은 줄어들지언정 <엑시트>의 재미는 더 커졌다.
2. 무해하고도 즐거운 경험이라고 앞서 표현했는데 말 그대로다.
검열 검열 검열, 끊임없이 내부에서 자기 검열을 거치고 만든 영화라고 생각된다. 먼저 어떠한 가치관도, 특정한 대상도 희화되거나 다치지 않는다. 상업영화일수록 기대하지 않는 부분인데 신기했다. 마케팅 과정에서도 '착한'영화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특히나 <라이언 킹>이나, <RBG>의 마케팅 과정이 아주 실망스러웠기 때문)
CJ 영화를 잘 보게 되지 않은 이유에는 당연히 '씨제이식 신파'가 있다. 아주 오랜 시간 그들이 구축해온 그들만의 습관. 개인적으로 마지노선은 <국제시장>이었던 것 같다. <국제시장>을 보고 나서 더 이상은 이런 식의 전개를 보기 힘들다고 크게 느꼈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세상도, 사람들도 바뀌었다. 상영관을 독점하기만 하면 무조건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던 때는 지났다. 사람들도 같이 똑똑해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스크린 수가 많아도 안 되는 영화는 안된다. 이런 관객들은 영화가 재미있다고 느끼다가도 클라이맥스에 눈물을 위한 극적인 씬이 등장하면 멈칫하기 쉽다.
<엑시트>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억지로 극적인 드라마를 주는 건 아무리 영화라도 역효과가 나기 쉬운 법. 이 영화는 크게 울지도, 일부러 사랑하지도 않는다. 억지스러운 러브라인이 없다는 이야기다. 주인공 두 사람이 일련의 과거를 가지고 있고, 엔딩에도 둘이 잘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조금 암시하는 게 전부다. 덕분에 영화는 가볍고 신선해진다.
3. 마지막으로 좋았던 점은 용남 역의 조정석 그리고 의주 역의 임윤아, 두 배우 그 자체다.
처음 시사가 있고 나서 정말 재밌는 영화가 나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재밌는 이유 중 하나로는 윤아의 연기가 좋은 점도 있었고. 일단 이번 여름에 개봉한 상업 영화 중 여성이 주연을 맡은 경우는 <엑시트>가 유일하다. 윤아가 유일하게 이번 여름 상업 영화 주연을 맡은 여성 배우가 되었다.
둘 다 주연이지만 전반적인 극을 리드하는 건 용남이라는 게 조금 아쉽지만, 상업 영화 중 이 정도까지 비슷한 비중을 보인 남녀 주연은 없었으니까 일단은 만족스럽다. (<뺑반>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마치 이런 역할을 기다려왔던 듯 윤아는 보란 듯이 멋진 연기를 보인다.
조정석과 윤아가 가진 각각의 건강한 에너지가 영화에서 멋진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두 사람이 붙은 씬이 계속되는데, 캐스팅이 빛을 발한다.
둘의 연기도 좋지만 두 인물의 쓰임 자체가 좋았다. 조연의 경우도 좋았다. 작은 캐릭터들은 조력자의 역할에 충실한다. 절대적인 악 없이도, 작은 캐릭터들의 자잘한 개개인의 사연들 없이도 영화는 완벽한 만듦새를 갖췄다. 이야기가 벗어났지만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데는 두 배우의 공이 컸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결론이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특히 상업영화를 보고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자면, 엔딩에 테마곡이 관을 울리며 흘러나올 때,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될 때 가슴이 뛰던 때가 있었다. 잊고 지냈지만 그런 때가 있었다.
오랜만에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나 분명히 꼭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디 가서도 내가 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작은 <엑시트>지만 시간은 흐를 거고, 더 많은 좋은 작품이 나올 거다. 그 흐름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평소 영화제 영화나 독립영화를 주로 보지만 사실은 한국 상업영화 좋다. 엄청난 돈으로 멋진 그림을 만들어낸 영화들을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나. 영화의 기본은 오락, 엔터테인먼 트니까.
다만 좋은 영화를 못 만났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강형철 감독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꼭 감독이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만나 즐거움을 얻는 건 멋진 일이다. 다양한 타깃 모두가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일은 엄청난 예술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을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는 거고.
말이 길어졌다. 결론적으로 무해하고 건강한, 그러면서 본분에 충실해 짜릿한 (손 발에 땀이 가득 해지는) 영화를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기꺼이 또 보러 갈 의향이 생기는 영화. 그리고 앞으로 이상근 감독님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지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