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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May 12. 2022

너 월 300은 버니?

내 안의 '엄마'와 나누는 다정하고 사적인 대화를 시작하며


그래서, 너 한 달에 300만 원은 버니?

아... 엄마 이제 그만. 나 내일 아침 수업이야. 수업 준비해야 돼요.

얼마나 버는데?

안 알려줄 거야. 몰라도 돼. 알려고 하지 마.

왜 좀 알자.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 나 잘 먹고 잘 사니까 걱정 마세요.


며칠 전 밤에 엄마와 했던 통화 말미의 내용이다.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약간의 불편함과 왠지 모를 조마조마함을 느끼며 이어나가던 대화가 기어이 내가 결코 원치 않는 주제에 이르자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대화를 끝내 버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불편한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한참을 무엇이 왜 이렇게 불편한지 생각해 보아야 했다. 엄마는 왜 이런 것을 자꾸 묻는지, 나는 이런 질문이 왜 불편한지, 아까 나는 내 마음을 잘 말한 것인지, 질문을 막고 대화를 단절하는 것보다 더 나은 대처는 없었을지 등등... 그나마 얼마 전에 연인과의 이별이라는 대사건을 소화해내느라 <비폭력 대화> 책을 읽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전에도 이미 여러 번 내가 제발 하지 말라고 했던 질문을 다시 딸에게 묻는 엄마의 마음에는 어떤 욕구가 있는 것일까. 그전에 엄마는 지금 나에 대해 어떤 점들을 어떻게 보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나는 물론 저런 질문을 받고 싶지도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런 질문을 들으면, 내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엄마가 만족하고 안심할 만큼(그게 월 300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충분히 벌지 못하면 엄마를 실망시킨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내 삶을 엄마의 기대(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엄마의 기대라고 내가 생각하는 어떤 기준, 사실은 내 안에 있지만 내 멋대로 엄마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꼬리표를 붙인 기준들)에 맞춰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낀다. 이런 느낌은 내가 통제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끌고 그 때문에 강한 거부감과 반항심이 올라오는 것이다. 또 스스로의 삶을 비루하게 느꼈던 날의 기억과 감정들을 소환해서 다시금 나 자신이 맘에 들지 않는 우울한 상태에 빠져든다. 그나마 그날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기에 저 정도였지 만약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면 노골적으로 엄마를 비난하고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내가 했던 대처는 그리 훌륭했던 것 같지 않다. 엄마의 감정과 욕구는 물론 나의 감정과 욕구도 잘 공감하고 표현하지 못했다. 최악은 아니었어도 worst 10안에는 들만한 대답이었다고나 할까...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엄마에게는 의아하고 이해되지 않는 선택이 가득한 딸의 삶일 것 같다. 제법 명문이라고 불리는 대학의 화학과를 졸업하고서 공연예술을 연구하는 대학원에 가고, 연극을 만들며 몇 년을 보내고, 연극 창작 실기를 하는 두 번째 대학원에 갔다가 지금은 졸업을 연기한 채, 요가강사이자 피트니스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는 딸. 그것도 모자라 여전히 뭐를 계속 배운다고 알렉 학교(알렉산더 테크닉 국제 교사 지도자 과정)에 들어가 1년에 등록금을 몇 백 만원씩 써가며 수업을 들으러 다닌다는 애. 그걸 시작한 게 언제인데 아직도 2학년밖에 안됐고 앞으로도 1년 넘게 더 학교를 다녀야 자격증을 딴다는 너. 그러고 나면 그 후엔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그게 지금 하는 요가나 피트니스 트레이닝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연극은 아예 때려치운 건지? 자격증을 따고 나면 수입이 지금보다 나아지는지, 지금처럼 바쁘게 여기저기 수업을 하러 뛰어다니면서 쥐꼬리만큼씩 인지, 소꼬리만큼씩 인지 모를 돈을 버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궁극적으로는 그래서 살기 더 편안해지는지... 엄마는 이런 것들이 궁금한 게 아닐까. 이런 부분들을 잘 알지 못하니 엄마로서 딸의 삶이 걱정되고 안쓰럽고 불안하지 않을까 싶었다. 엄마에게는 내가 행복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을 가장 바랄 테니까 말이다. 그래야 엄마도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지실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저 딸을 더 알고 이해하고 싶지 않을까. 그래서 더 친밀함을 느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이러한 많은 느낌과 욕구를 품은 마음이 "한 달에 300만 원은 버냐?"는 뾰족하고도 뭉툭한 질문으로만 표현된 것이 아닐까? 엄마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이 추측이 어느 정도 맞다면, 이런 것을 이해한 나는 다음번에는 엄마의 질문에 조금 더 나은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여전히 위와 같은 엄마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답이 엄마의 욕구를 그리 잘 채워준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엄마가 내뱉은 저 거친 대표 질문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다른 많은 세부 질문들이라면 답을 하고 싶다. 나 역시 엄마가 보는 것과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도 엄마와 연결되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공감 어린 지지를 받고 싶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니?

-그 일이 재미있니?

-그 일은 어떤 가치가 있니?

-앞으로도 그 일을 계속하고 싶니? 그렇다면 왜?

-알렉산더 테크닉이 뭐니?

-소매틱스가 뭐니?

-소매틱스랑 요가를 접목시키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

-연극원 졸업은 할 거니?

-예술적인 삶은 무엇이니?

-운동은 왜 해야 하니?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이니?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이니?

-편안하다는 것은 무엇이니?

-몸과 마음은 어떻게 연결되니?


이 질문들 중에 얼마나 답을 할 수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스케일도 범주도 중구난방인 질문들이지만 내 삶과 일에 대해 스스로 떠올리는 질문들이다. 어느 정도 나에게 답이 있는 것들도, 전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도 있다. 다만 얼마나 큰 질문이건, 얼마나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이건 간에 그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답을 해보고 싶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오랜만에 브런치를 다시 열었다. 거의 1년 만이다. 현실과 상황 때문이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며 미뤄왔지만, 사실 마음 깊숙이 글을 쓸 동력을 잃은 채 지내왔다. 하지만 이제 다시 내 안에 고개를 드는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정리해야 하는 시간이 온 것 같다. 엄마와의 대화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 엄마의 형상을 하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재촉하는 어떤 자아와의 대화이기도 하다. 이 대화의 과정이 다정하고 성실하고 즐겁기를 바란다. 이 대화를 통해서 내가 나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내 선택들에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조금 더 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묻는 질문들에 조금 더 여유롭게 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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