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30대 중반, 미혼, 엄마의 몸
어제 '예술육아소셜클럽'과 '윈드밀'이 함께 주최한 오픈 마이크 행사에 다녀왔다. 윈드밀은 용산구에 있는 퍼포먼스 공간이다. 예술육아소셜클럽은 "예술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예술 환경을 만들고자"하는 아티스트 연대이다. 윈드밀 운영진과 예술육아소셜클럽 구성원들이 '자신의 몸' 혹은 '엄마로서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30대 중반, 여성, 미혼, 아이를 낳고 싶은 욕구를 종종 문득 느끼는 한 사람으로서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고민과 생각, 몸의 기억과 감각의 흔적들이 뒤섞이는 시간이었다. 계속 떠오르고 뒤섞이는 생각들을 하나로 꿰어내기는 어렵고 다양한 이야기와 목소리가 흘러가고 교차했던 행사의 성격처럼 나도 떠오르는 단상들을 그대로 끄적여보기로 한다.
엄마의 몸이 된다는 것
엄마들은 조금 전까지 나의 일부였던 것을 세상 밖으로 보낸다. 내 몸의 일부를 떼어서 나와 분리된 개체로서 독립시키는 것. 이것이 엄마가, 부모가 되는 일이다. (어쩌면 당연히, 어쩌면 애석하게도 어제 행사에 아빠의 몸에 대해 말하는 발언자는 없었다.)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은 엄마들이 이 과정을 불가역적인 과정처럼 느끼는 듯하다. 한 번 엄마가 된 몸은 다시는 그 전의 아이를 낳지 않은 몸처럼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이다. 아이가 나오는 과정에서 회음이 찢어지고, 내 몸의 중심은 해체된다. 임신 과정을 차치하고 분만 자체만 보더라도, 이것은 이미 커다란 상실이다. 온전했던 내 몸의 상실이자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던 세계의 상실이다.
이렇게 내 배 아프고 내 밑이 찢어지는 고통을 통해 아이를 낳지만 엄마의 몸은 아프면 안 된다. 시도 때도 없이 수유 콜이 울리고, 언제 아이가 아플지 모르고, 아프지 않아도 언제 아이에게 내가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파도 아이들이 "엄마~"하면 깨어나야 한다. "엄마, 엄마, 엄마아~"하면 그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그 요청에 반응해야 한다. 우리 엄마도 나를 키우는 내내 별로 아프신 적이 없다. 아마도 많이 아프고 아팠겠지만, 나와 언니에게 제대로 티 내신 적이 없다. 엄마는 항상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아~"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어제까지도 30년 넘게 괜찮은 우리 엄마가 신기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우리 엄마는 원래 건강한 통뼈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괜찮았던 덕분에 나는 마음껏 아프고, 슬프고, 괴로울 수 있었다. 이걸 잘 몰랐다.
더 이상 처녀 때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단지 더 이상 빠지지 않는 뱃살이나 몸매의 문제만은 아니다. 온몸의 기름기가 쪼옥 빠져나가 피부는 탄력을 잃고 머리카락은 푸석해진다. 우리 엄마처럼 빠질 만큼 빠져도 아직 수북한 머리숱이 있는 사람은 행운이다. 관절들이 마디마디 흔들리고 어긋나서 끊임없이 작은 움직임들로 내 몸을 돌보지 않으면 뻐근함이 쌓여만 간다. 수유를 하기 위해,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꿈쩍 않는 아이를 등원시키기 위해 아이를 번쩍번쩍 들어 올릴 때마다 팔에 근육이 생기기보다는 허리 디스크가 조금씩 밀려 나온다. 어제 나를 이 행사에 데려갔던, 역시 예술하는 엄마인 나의 친구는 첫째 아이 출산 후 시작된 허리 통증 때문에 "아이고~"를 여러 번 외쳤다. 공연을 본 후 같이 차를 마시다가 둘째 아이가 눈이 빨갛다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메시지를 받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 만난 많은 엄마들과 우리 엄마의 이야기들을 보고 듣고 떠올리며 생각했다. 나는 정말 아이를 낳고 싶은가? 그렇다면 어째서? 이 모든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듣고도 왜 나는 여전히 엄마가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정말 아이를 낳고 싶은지, 그저 사회문화적인 압력을 느끼고 있을 뿐은 아닐까? 임신 가능성이 점차 낮아지는 30대 중반을 임신 가능성 없이 지나 보내고 있는 여성으로서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는 정도가 아닐까?
<메기스 플랜>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임신과 출산이 나로서 오롯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를 낳으려면 배우자가 있어야 하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 평생 사랑할 거라고 다짐하고 약속한 사람의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메기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원하는 유전자를 가진 남자에게 정자 기증을 요청한다. 얼마 전 꽤나 이슈가 되었던 사유리 씨의 임신 및 출산 소식처럼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여전히 매우 어려운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했다 이혼을 할망정, 애초에 가족 제도에 속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고 기르겠다는 결심을 하기에는 문화적 편견이 두텁고, 복지 제도 역시 후진적이다. 내가 아는 브라질리언 부부는 8살 된 딸을 하나 두고 있는데, 브라질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혼인 신고를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작년에 한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부부가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급히 혼인 신고를 하게 되었다고...
나는 '엄마 같다'는 칭찬 같은 평가의 말을 종종 듣곤 했다. 따뜻하고 섬세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챙긴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런 자신이 뿌듯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나는 왜 호구처럼 만날 마음을 퍼줄까 싶어 짜증 난 적도 있었다. 전 애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뭔가 밑지는 심정이 될 때가 종종 있었다. 나는 왜 늘 더 마음을 쓰고, 헤아리고, 보살피고, 보듬고, 이해하려고 애쓰지 못해 난리일까? 나의 마음에 차게 행동하지 않는 상대에게 휙휙 등을 돌리고 쿨하게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지 못할까? 왜 늘 편안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해서 상대가 나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보며 쓸쓸해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서글퍼했지만 대게는 내가 스스로 결정한, 내가 원했던 관계였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들 중에 '엄마'의 얼굴을 한 목소리들이 있다. 이 목소리들은 나의 엄마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진짜 엄마의 목소리는 아니다. 내가 '엄마'라는 이름을 붙인 나의 일부이다. 한동안은 내가 썩 맘에 들어하지 않는 나의 얼굴과 목소리들에 죄다 '엄마'라는 이름을 붙인 적도 있었다. 그러고선 엄마로부터 독립하고 싶다고, 내 안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실은 나의 목소리일 뿐이었다. 이 목소리가 엄마의 말투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내 말투와 얼굴이 엄마를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그저 영향을 미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에 깊이 각인되어 있고 실은 나는 엄마와 그리 다른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히드라의 몸통에서 새끼 히드라가 자라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그 녀석이 똑 떨어져 새로운 히드라 개체가 되는 영상이 떠오른다. 과학 시간에 무성생식을 공부하면서 보았던 것 같다. 이 새끼 히드라는 언제까지는 그저 엄마 몸의 일부였을 뿐이고, 언제부터 새끼 히드라였을까? 그런데... 그렇게 떨어져 나온 새로운 히드라는 그 모체 히드라랑 똑같이 생겼단 말이다. 몸체 대부분이 줄기 세포 자체로 이루어진 히드라에게는 노화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다 자란 새끼 히드라와 엄마 히드라는 구분될 수 없으려나? 이걸 쌍둥이라고 해야 할까 엄마와 자식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인간 엄마는 노화도 하고, 인간 자식은 아빠의 유전자를 절반 물려받는 유성 생식을 하고 당연히 다르다. 다르지만... 정말 그렇게 크게 다를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나'라는 존재를 깊이 각인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아끼는 친구, 애인, 가족, 아직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나의 아이에게. 그렇게 엄마가 되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그렇게 보듬고 보살피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결국 내 몸의 일부를 떼어 나라는 존재가 각인된 누군가를 세상에 내어 놓고 싶은 것일까? 카페 왼쪽 옆 테이블의 여성분은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있다. 그래. 어디서 온 지 모를 이 욕망은 결국 뻔하게도 유전자 드라이브가 걸린 생식 전차일 뿐일까? (리처드 도킨스의 책이 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굳이 이 생물학적 욕망을 따르지 않아도 내가 크게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인가? 아닌가? 10년 후쯤 내 본성에 새겨진 욕망을 거스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까?
이런 질문들을 떠올리는 와중에 오른쪽 테이블에 "임산부 먼저" 배지를 가방에 단 여성분이 와서 디카페인 커피를 마신다. 답을 당장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조금씩 더 뚜렷해질 거라는 건 알겠다.
윈드밀
이미지: Alex Hyde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