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다큐멘터리의 경계,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이 글은 드라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그 해 우리는" 시청을 마치고, 다음은 뭘 볼까 생각하다가 평소에 좋아하던 김태리 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야기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시청하게 된 드라마가 있다. 로맨스 드라마를 연속으로 시청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 법도 한데, 첫 화를 시청하고서는 그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2022년 겨울과 봄을 함께 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희도의 남편, 정확하게는 희도의 딸 민채의 아빠 찾기에 모두가 열심이었다. 드라마가 종영한 지금, 잘 생각해보면 이 드라마는 단 한 번도 민채의 아빠를 찾아보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 오히려 초반부터 민채가 김 씨라는 것을 밝혔고, 이진이 더 이상 함께하고 있지 않음을 넌지시 말해왔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민채의 아빠가 이진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아니, 이진이여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내고 있었다.
이러한 시청자들의 노력과 가능성 있는 논리에도 불구하고, 희도와 이진은 결국 이별을 맞이했고, 민채의 아빠는 이진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이에 많은 시청자들이 엔딩이 굉장히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세기의 커플처럼 만나 사랑을 했으나, 결국 평범한 커플과 다를 바 없는 그저 지극히 평범한 이별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 어이없는 이별. 고작 이런 이별을 위해서 기나긴 회차에 거쳐 둘의 알콩달콩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다니, 그리고 그에 비해 이별을 위한 빌드업은 이리 짧다니, 배신감을 느꼈다는 의견이 많았다.
나 역시, 이별이라는 엔딩을 보며 약간의 실망감과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둘의 헤어짐이 이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걸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대부분의 만남과 이별이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다들 세기의 커플처럼 만나 드라마 같은 사랑을 하고,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별을 경험한다. 딱, 스물다섯, 스물 하나, 그 언저리에 우리가 경험했을 법한 사랑. 우리는 희도와 이진을 통해, 한 번 즈음은 꿈꿔왔을 만한 사랑의 모습을 투영하고자 했지만, 그 둘이 보여주고자 했던 건 오히려 드라마를 시청하는 우리의 사랑 이야기였던 것이다.
선수생활을 하느라, 남들 다 가는 수학여행을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희도와 유림. 그 이야기를 듣고 이진은 다큐멘터리 촬영 겸 그들을 위한 수학여행을 기획한다. 그런데 왜 스포츠 기자가 그 촬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개인적 친분이 있다고 해도, 이를 방송국에 명확하게 공유하지는 않은 상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설정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여기에 다큐멘터리 촬영이라는 요소를 왜 넣었을 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당신이 바닷가에서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뛰어놀며 불꽃놀이를 하고, 노을을 바라보며 영원을 약속하는 다섯 명의 청춘들을 보며, '참 좋을 때다' 생각을 했다면, 이건 분명 그들의 약속이 지켜지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게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란 것을 알아차린 것은, 우리도 기억 속에 저런 순간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에 기반을 한 장르이다.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긴 하지만, 결국엔 허구로 가득한 드라마 안에서, 사실에 기반을 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는 설정은 그 '사실성' 혹은 '현실성'을 더 강조하고 싶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라는 장치는, 사실 이 드라마는 당신이 기대하는 그 '드라마'로써의 역할을 충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쓰였는지도 모른다. 그와 동시에, 사실 이건 희도와 유림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그 시절을 그려낸 다큐멘터리라는 걸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촬영 대상은 드라마 속 등장인물 다섯 명이었지만, 나중에 촬영 테이프를 편집기에 넣고 재생을 하면 우리의 모습이 나올 지도.
이 외에도, 이 드라마가 우리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알려주는 설정은 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리해고를 당하고, 은행이 부도가 나는 등 IMF와 관련된 내용, 그리고 세계가 충격에 빠졌던 9.11 테러와 같은 사건이 드라마에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과거를 회상했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이 시대적 사건들을 경험했을 우리들. 이는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서도 필요한 설정이었지만, 그 외에도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좀 더 느끼게 해주는 기능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드라마가 우리의 이야기임을 보여주는 설정이 하나 더 있다면, 바로 일기장이다. 이 드라마는 희도의 딸 민채가, 희도가 썼던 일기장을 몰래 읽는 것으로 시작해 일기장을 썼던 과거와 민채가 일기장을 읽고 있는 현재를 순회한다. 어릴 때 썼던 일기장이나 메모장이 남아있다면, 이 드라마를 계기로 한 번 들춰보기를 권장한다. 그곳에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내용, 정말 사소한 것으로 행복해했던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들을 잘 곱씹어보다 보면, 당신의 일기장이 희도의 일기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희도가 바닷가 수학여행을 갔다 왔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처럼, 당신이 잊고 있던 추억의 한 페이지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준 희도와 이진의 이별. 그 큰 실망감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이별 그 이후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다. (출세욕이 생각보다 강하다고, 이진이 조금 욕을 먹기는 했다.) 사실 이 드라마는 연애와 사랑 서사만이 메인은 아니었다. 가족과의 갈등과 회복, 가족을 위한 희생, 자신의 커리어를 위한 도전과 용기 등,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잘 생각해보면, 오히려 둘의 이별 후 이야기는 우리가 상상하던 드라마 서사와 좀 더 가깝다.
희도와 이진은 이별 후, 각자의 목표를 이루었다.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을 다시 한 곳에 모여 살게 하겠다는 이진은, 앵커가 되며 다시 가족들을 한 곳에 모았다. 그리고 희도는 올림픽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거머쥐며, 세계 최고의 펜싱 선수이자 유림이의 영원한 라이벌로 명예로운 은퇴를 했다. 누군가는 첫사랑의 결실을 맺었으며, 누군가는 남들은 감히 상상하지 못할 방식으로 자신이 잘하는 것을 찾아냈으며, 누군가는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던 세상에 반대로 재미를 가져다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각자, 가장 행복한 방식으로, 가장 이루고 싶었던 것을 이루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목표했던 걸 이루고 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들의 에필로그는 우리가 예상하던 드라마의 전개,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목표를 향해서 힘을 내보고 있는 우리들. 누군가는 그 드라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며,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행복을 찾을 것이다. 희도와 이진이 아무도 모르게, 잠깐만 행복하자고 약속했던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우리 나름대로 잠깐의 행복한 순간을 찾고,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 드라마는, 어찌 보면 뻔할 수도 있는 우리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청춘에 대한 소재를, 가장 뻔하기 때문에 오히려 모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 드라마를 한국판 라라랜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라라랜드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으나, 그래도 많은 이들이 실망했던 이 드라마의 엔딩이 라라랜드보다는 훨씬 깔끔했다고 생각한다. 라라랜드에서는 두 주인공이 계속 함께했다면 있었을 법한 상상을 잠깐 보여주는 데에 반해, 이 드라마는 오히려 그들이 망쳐버렸던 작별인사를 바로잡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라라랜드를 보았을 때는 찝찝함이 남았으나, 이 드라마는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이상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깔끔했던 이별이었다.
희도와 이진이 영원을 약속하는 순간, 배경음악으로 깔린 주제곡의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가사의 타이밍이 절묘하게 겹쳤다. 그렇게 그들의 영원은 지켜지지 않았으나, 이 드라마가 "영원한 건 절대 없어!"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 대신, 창고 한 구석에 쌓여있는 박스 속, 일기장의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희도와 이진, 그리고 그 친구들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영원을 노래하던 그 시절도, 그 시절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지금이 있다는 것도 아름다운 것임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영원을 지키지 못하면 뭐 또 어떻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드라마에서 희도의 명대사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네가 어디에 있든, 네가 있는 곳에 내 응원이 닿게 할게. 내가 가서 닿을게."
모든 이들의 스물다섯 스물하나, 그 언저리에 우리의 응원이 서로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