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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Nov 03. 2021

황금연차는 존재하는가

잃어버린(?) 내 황금연차에 대한 고찰


요즘 들어 사람 구한다는 연락을 많이 받는다. 교양, 예능 가릴 것 없이 프로그램마다 일손이 없다고 난리인데, 일주일에 한두 번은 사람을 구하는데 주변에 소개해줄 사람이 없는지 묻는 연락을 받는다. 아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작가 단톡방에도 매일 구인 글이 올라오는 걸 보면 정말 일 할 사람이 없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런 연락을 받을 때마다 소개해줄 만한 사람이 없는지 카톡 목록을 뒤져보는데, 애초에 인맥도 넓지 않은 편인 데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놀고 있는 건 나뿐이라 정말 소개해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주변에 '혹시 작가 없니?'하고 물어보면 '우리도 없어. 작가 없니?'라는 화답이 돌아와서 머쓱해진다. 한때 방송국과 제작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작가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참 미스터리 하다.


작가 부족 사태는 꽤 오래전부터 이어진 역사다. 일단 여기에서 말하는 '부족한 작가'는 막내작가부터 코너를 맡는 7~8년 차의 서브작가를 말한다. 이제 막 업계에 발을 들이고, 활발하게 활동하며 실무를 배워야 할 연차가 사라지고 없단 뜻이다. 한 팀의 핵심 인력인 이 연차들을 [황금연차]라고 부르는데, 이전에도 후배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이야기는 많았지만, 황금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으며 품귀현상이 생긴 것은 2~3년 정도 된 것 같다. 품귀현상이 생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방송 아니어도 선택지가 다양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가 그 연차였을 땐 황금연차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오히려 내가 그 시기일 때는 '지금은 힘들어도 10년 차가 넘어가면 일자리가 많을 거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지금은 황금연차로 가기 위해 경력을 쌓고 고생하는 시기라고 말이다. 막내 때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10년 차가 된다는 게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막상 그 연차가 되고 보니, 내가 이미 지나온 연차가 황금연차가 되어 있었고, 10년 차 이상은 자리가 없는(정확히는 불균형이 굉장히 심한) 시기가 되어있었다. 열심히 일은 했지만 내세울 경력이 많지 않은 작가뿐만 아니라, 꽤 이력이 좋은 비슷한 연차의 작가들도 일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단 소식에 아이러니해졌다.


도대체 황금연차가 뭐지? 누군가는 나에게 곧 다가올 거라고 했고, 누군가는 나에게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황금연차를 거친 걸까? 아니면 다가올 황금연차를 기다리고 있나? 그런데 황금연차가 되면 뭐가 달라지는 거지? 나는 황금연차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황금연차라는 말이 궁금해졌다.

주변에서 다들 황금연차, 황금연차 이야기는 하는데 정확히 어떤 걸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고 다른 데서도 통용되는 말인지도 궁금해졌다.


일단 구글에 검색해봤다. [황금연차]를 치자 황금열차를 찾았냐는 메시지가 떴다. 구글 알고리즘이 오타라고 여길 정도로 자주 쓰이지 않는 단어인 듯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황금열차에 대해 설명해주는 페이지들이 눈에 띄었다.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괜히 궁금해져서 관련 글을 몇 개 읽어보았다.


황금열차는 과거 독일 나치가 폴란드 터널에 숨긴 열차를 뜻하는데, 2016년 황금열차를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터널 안에 열차는 없었고 해프닝으로 끝난 듯 하다. 황금연차보단 확실히 좀 더 대중적으로 흥미 있을 내용이다.


그렇다면 네이버는 어떨까? 이번에는 네이버에 [황금연차]를 쳐봤다. 네이버 역시 황금연차 대신, 황금연휴에 관한 글들이 나왔다. 직장인들은 주말과 연휴가 길게 이어지는 황금연휴 시기를 찾고 그때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낙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일이 바쁠 땐 주말도, 연말도, 새해 첫 날도 없는 프리랜서로써 황금연휴는 남의 일이었기 때문에 블로그 글을 몇 번 눌러보고 창을 껐다.


국내외 가장 큰 포털사이트에서 조차 오타로 인식할 정도면 확실히 많이 쓰이는 개념은 아닌 듯 하다.

일단 회사와 연차라는 단어 사이에 이질감이 든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지만 한 팀이 꾸려지면 상하 체계가 확실하게 구성된다. 그때 상하 체계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연차다. 연차에 따라 작가는 팀 내에서 내 위치, 해야 할 일, 크게는 페이까지 결정되기 때문에 연차를 이야기하는데 매우 익숙해져 있다. 이 세계에서 살다 보니 외부에서는 연차라는 개념 자체를 잘 쓰지 않는다는 걸 간과했다.


아무튼 방송계에서는 나름 중요한 연차 앞에 황금이 붙는다는 건 또 어떤 의미일까?

황금은 반짝반짝 빛난다. 물론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작가의 경력을 나타내는 연차 앞에 황금이 붙었으니 반짝반짝 빛나는 시기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리고 황금연차에 해당하는 후배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니 다들 반짝반짝 빛나고 귀한 것이, 이 비유가 맞단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빛남을 나로 치환해보면 물음표가 떠진다. 내가 언제 저렇게 빛났던 적이 있던가? 물론 내가 타인을 볼 때와 나 자신을 바라볼 때 시점의 차이가 생기는 건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황금연차 시기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런가?'라는 의심만 되풀이된다. 그렇다고 선배들에게 '제가 황금처럼 빛나 보이던 때가 있었나요?'하고 물을 순 없으니 다른 가설을 생각해봐야겠다.


두 번째는 황금처럼 귀하다는 것이다. 귀하다에서 확실히 이쪽으로 무게가 더 실리는 것 같다. 실제로 작가를 구하는 이야기를 할 때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게 '귀하다' '정말 필요한데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니 말이다.

황금도 정말 귀하고 모두가 갖고 싶어 하지만, 잘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구인공고에 올라오는 글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90% 이상이 황금연차를 구하는 글이다. 특히 막내부터 6년 차 미만을 구하는 글이 가장 많았다. 내가 아는 후배들만 생각해 봐도 본인이 자의로 쉬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한 쉬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을 정도로 일자리 제안이 끊임없었다.


그런데 정작 황금연차인 후배들과 이야기해보면 본인들이 황금연차라는 말에 동의 못하겠단 반응이 많다. 항상 잠이 부족하고, 시간에 쫓기고,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일하는 것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연차가 어리기 때문에 방송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은 거의 하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교양의 경우에는 빠르면 2년 차에 자기 코너가 생기지만, 예능은 본인이 담당하는 촬영이 생기기까지 최소 5~6년은 걸린다. 출연자와 직접 촬영에 대해 논의하고, 구성을 하고, 섭외를 하고 이런 일들을 하려면 7년 차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 아래 연차는 자료조사, 섭외, 소품 등 방송 준비 전반적인 일을 하다 보니 일은 많은데 서포트만 하다 보니 보람을 느끼기가 쉽지 않단 것이다.


어느 분야나 전문적인 일을 하려면 경력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말로는 귀하다고 하면서 잡일만 하고 있단 느낌이 들면 썩 유쾌하지 않을 것 같단 생각도 든다.


심지어 몇 년 사이 OTT 시장이 커지면서 방송보다는 웹 콘텐츠의 힘이 커진 것도 한 몫한다. 웹 콘텐츠의 경우에는 제작비도 적고 제작 인원도 적지만, 오히려 젊고 톡톡 튀는 감각을 선호하기 때문에 방송보다 훨씬 어린 연차의 자기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메인이 될 수 있다. 똑같이 바쁠 거라면 내 이름을 걸고 모든 제작을 스스로 책임지는 쪽이 더 보람되다고 느낄만하다.


한 프로그램에서 했던 같이 일했던 후배가 있다. 나이와 연차가 아직 어린 황금연차에 속한 후배였는데, 방송에서는 막내 바로 위치로 자잘한 업무를 맡고 막내를 가르쳐주는 위치였다. 하지만 나와 같이 일하기 바로 직전에는 웹 콘텐츠에서 메인작가로 일했었고, 방송을 더 배워보고 싶다고 왔던 후배는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다시 웹 콘텐츠로 옮겼다.


방송이 웹 콘텐츠보다 스케일도 크고 배울 것도 많지만, 굳이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고 일은 많은 분야에 있을 필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선배들은 '큰 물에서 작은 물로 옮기는 건 가능해도 작은 물에서 큰 물로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한다. 나 역시 매우 공감하지만, 그러면서도 후배의 말과 선택도 매우 공감 갔다. 나라도 똑같이 일이 많을 거라면 내가 주도적으로 계획해서 성과를 내는 쪽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 차이가, 황금연차가 방송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중요한 키워드란 생각이 들었다.


과거 TV 채널끼리 경쟁하던 시대에서는 채널을 옮기고 분야를 바꾼다고 해도, 고착된 시스템은 비슷했다. 내 연차쯤 되면 팀에서 어느 위치를 담당하게 되고,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인지가 대충 예상이 된다. 하지만 크고 작은 웹 콘텐츠가 등장해 경쟁하는 시스템에서는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가 맡는 역할도, 나에게 주어지는 일도, 책임도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방송국에서는 한 시간 방송에서 10분짜리 코너를 맡는다면, 웹에서는 10분짜리 단독 콘텐츠의 메인이 된다. 어느 쪽이 매력적으로 들릴지는 누가 봐도 자명하다.


채널이 늘어났고, 선택지가 다양해졌다. 이제 후배들은 방송만 바라보지 않는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들에게는 지금 이 현상이 너무 당연한 거지만, 그렇지 않았던, 방송 외에 선택할 여지가 거의 없던 시절을 보내온 선배들에게는 이 상황이 매우 어색하고 당황스럽기만 하다.


이제 겨우 10년 차를 넘긴 나도 후배들을 이해하면서도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따라가기 힘든데, 방송계의 정해진 틀에서 20년, 30년 일해온 선배들에게는 이 상황이 어떻게 보일까. '힘들어도 방송에서 배우다 웹으로 가는 건 다른 문젠데. 힘들어도 좀 더 크게 보고 배워두는 게 좋을 텐데''결국 방송으로 돌아올 텐데'라고 말하는 건 어찌 보면 그들이 지금까지 봐온 세상이 그랬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시점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앞으로 더 넓어질 것 같으니, 나처럼 중간에 끼여서 양쪽 다 이해되는 세대만 '일할 사람이 없는데''어떻게 하지'하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시대에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고 진화한 후배와, 과거의 영광을 여전히 쥔 선배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황금연차를 한 번도 맞아보지 못한 나는 이것이 진정한 낀세대 아닌가 생각한다. 가장 힘든 건 양쪽의 생각에 모두 공감한다는 점이다. 관점의 차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본 세상이 다르니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도 당연하다. 어쩌면 존재하는지도 모를 [황금연차]에 집착하는 내가 가장 뒤처져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치의 황금열차처럼, 황금연차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황금이라는 보기 좋은 수식어를 붙여놓고, '저 때가 되면 다 좋아질 거야' '저 사람들은 황금연차라 좋겠네 나는 힘든데'하며 의미 없는 푸념을 하며, 그때가 되면 모든 게 다 빛나고 좋아질 거라는 의미 없는 희망을 품게 하는 존재 말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 황금 찾기의 끝은 아무것도 없었다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황금연차를 말을 붙이는 걸 삼가기로 했다. 스스로 '황금연차'라고 지칭하는 게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이 붙이는 말은 상대에게 운이 좋다고 비꼬는 것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그리고 나에게 황금연차가 있었는지, 아니면 언젠가 찾아올지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실체를 모르겠는 황금을 쫓느니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훨씬 생산적일 것 같기 때문이다.


다만 언젠가 내가 나 스스로에게 '지금이 황금연차 같은데'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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