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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킴 May 03. 2020

웰다잉 - 안락사를 생각해본다.

편안함, 두려움... 과연 어떤 것일까?

죽음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 없이 살아왔던 것 같다. 그저 먼 훗날의 이야기라고 먼발치에 밀어내 왔던 것은 아 닐까?

 하지만, 최근 읽은 프랑스의 소설가인 Francoise Sagan의 소설에서 황당한 문장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문장이었다.

 마약 관련 재판에서 변호사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마약, 술, 담배 등을 통해 나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변론한 것이다. 이는 개인의 행동 선택의 자유와 생명에 대한 국가 통제의 대결 구도에서 전자에 더 우선순위를 준 변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락사나 자살도 ‘나를 파괴할 권리’ 차원에서 인정해야 하는가에 찬반 논쟁이 있을 수 있다. 현재 자살을 유죄로 인정하는 소수의 국가가 있고,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자살을 무죄로 인정하는 다수의 국가가 있다. 그렇다면 비록 안락사는 자기 파괴 결정권의 논리로 법이 허용해야 하는 것인가?

 다음의 3가지 이유 – 환자의 존엄성과 가족 고통의 절감, 환자의 장기 기증 문화로 사회에 기여, 경제적인 빈곤 이유로 안락사 남용 문제를 보완 - 를 통해서 안락사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써 보고자 한다.


 먼저, 안락사는 죽음을 앞둔 환자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며, 주변 가족과 돌봄 서비스 종사자의 정신적 고통을 줄여준다는 차원에서 합법화할 여지가 있다. 안락사란,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불치병 환자가 당사자 또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만약 부모님 중 한 분이 머지않아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고, 당사자가 안락사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최선을 다해 그분의 생명을 연장하도록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인지, 고통을 덜어주고 원하는 사망 시기와 장소를 선택하게 할 것인지 고민이 될 것이다.

 실제로 내 지인은 암 말기 환자를 1년 넘게 연명치료를 하고 있다. 당사자는 처음에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으나, 최근에는 본인의 힘든 고통과 자녀들의 정신적 고통 때문에 종종 고민을 한다고 한다. 본인의 육체와 정신이 초라해질 뿐 아니라, 주변 가족도 많은 시간과 비용을 희생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 임종에 가까운 환자는 요양병원에 있기보다 정이 들고 익숙했던 집에 가서 마지막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고 한다. 진정한 Well-dying은 자기 결정권이 생명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는 관점을 반영한다. 이와 같이 본인의 명예와 존엄, 가족이 환자에 대한 좋은 마지막 기억을 갖게 하는 차원에서 안락사는 허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둘째로, 장기기증 문화 확산 차원에서 안락사는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죽음으로 기억될 수 있다. 최근 뉴스 기사에서 ‘장기기증으로 8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제목을 접했다. 그의 이름은 Qiu Yuanjun이라는 의사이다. 그는 코로나 19 환자를 돌보는 중국 의사였으나,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뇌사 판정을 받고 사망했다. 그의 아내는 장기 기증 서약서를 사전에 작성한 남편을 위해 그의 신장, 심장, 간, 각막 등의 장기 기증을 최종 결심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국민의 존경과 애도의 추모가 이어졌다. 그는 자기 죽음에 대한 철학을 미리 고민했던 것이고, 그런 준비로 인해 8명의 새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안락사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마지막까지 의식이 없거나, 고통스러운 연명치료로 견디기보다 장기 기증을 통해 다른 환자에게 이식함으로써 아름다운 죽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새 생명을 선물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산 기부 의향서나 사전 장례식 절차 의향서를 미리 결정하여 환자 사후 원하는 데로 해 줄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안락사는 가난한 자의 생존권 위협이라는 논리로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 즉,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자는 자기 의도와 상관없이 생존권을 위협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상 맹주만 교수는 이처럼 지적했다. 당사자의 동의 방식을 느슨하게 정의함으로써 안락사 집행에 자의성과 임의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안락사는 2가지의 종류로 구별할 수 있다.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요청에 따라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에게 약제 등을 투입하는 인위적인 죽음이다. 이에 반해 소극적 안락사는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 공급이나 약물 투여를 중단함으로써 환자를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적극적 안락사이든, 소극적 안락사이든 둘 다 빈곤한 환자는 생존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엄격한 기준을 정해서 생존권 위협 문제를 해결하였다. 참고로 2002년 네덜란드는 최초로 안락사를 허용했고, 이어서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에서도 허용했다. 즉 존엄한 죽음 선택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안락사를 살인 행위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안락사에 대한 논쟁은 크게 개인 자기 결정권과 인간 생명의 가치를 위한 국가 통제라는 프레임으로 볼 수 있다. 환자와 가족의 합리적인 판단만 전제된다면, 위의 3가지의 이유 – 환자의 명예와 가족 고통의 완화, 장기 기부 및 이식 문화의 확대, 경제적 문제로 인한 생존권 위협 보완 – 를 들어 안락사의 합법화를 지지하는 편이다. 인도 출신 의사인 아틀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의 과정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 책에서도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하라. 삶도, 죽음도 모두 그들의 것이다. 생물학적인 삶보다 죽는 사람의 마음에 흡족한 well-dying이 더 중요하다.’라는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안락사가 허용되는 체제와 문화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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