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시민의 삶에 대하여
최진영의 <돌담>에서 장난감 제조 중소기업에 다니는 ‘나’는 어느 날 사장과 영업부장과 생산부장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서 충격을 받는다. 회사가 제품 안전성 인증을 받기 위해 따로 검사용 제품을 만들고 있으며 실제 제품은 사용이 금지된 화학 첨가제를 듬뿍 넣어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회사가 몇 년 전 그와 관련해 단속당한 적이 있으며 제품 수거 명령까지 받았다는 사실도 기억해낸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다른 회사에서도 다 쓰는 건지도 모른다 나쁜 짓이 아니라 사업 수완일 수도 있다’에서 시작해서 ‘난 괜찮잖아’라며 넘어갔다가 플라스틱에 담긴 음식을 데울 때 잠깐 고민하는 수준으로 무던해진다. 그러다 신입 사원 이찬양씨에겐 ‘프탈레이트 가소제 알아요? 그거 좀 들어가줘야 사람이 쓰기 편한 제품이 되는 거지’라며 합리화까지 시도한다.
그래도 ‘나’는 완전히 저항을 포기하진 않는다. ‘그 사실을 안 이상 그냥 있을 수 없고, 정당하게 일하고 싶어’ 영업부장과 다투고 결국 회사를 관두게 된다. 영업부장은 ‘당신 마음대로 해봐 뭐가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라며 고함을 지른다. ‘우리 때문에 사람이 죽었나?’라는 외침만이 남는다. 그런데, 그렇게 회사를 나온 ‘나’는 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어릴 적 함께 놀았던 고향 친구, 선망했던 과수원 이층집 딸 ‘장미’와 관련한 진실이다.
심장병을 앓아 학교를 늦게 들어간 장미의 동생 미래는 대학생이 되자 유원지로 엠티를 가기 위해 동네 사람 오명곤의 버스를 빌린다. 동네 토박이인 오명곤이 퇴직금으로 산 버스는 동네 사람들의 발이었다. 동네 사람들과 장미네 아버지는 ‘버스를 빌릴 거면 오씨네 버스를 써주라’며 적극 권할 정도다. 그런데 이것이 비극이 된다. 미래와 일행을 싣고 엠티를 가던 버스에 불이 났고, 기사 오명곤과 미래를 비롯한 다수가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슈퍼 앞 평상에서 ‘어렸을 때부터 죽을 고비 여러 번 넘긴 아이는 살 만큼 산 거’라며 막말을 퍼붓는다. 장미 어머니는 그들에게 돌을 던지고 장미 아버지는 도끼를 들고 슈퍼 평상을 부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세상과 단절되려는 듯 틀어박혀 돌담을 쌓기 시작한다.
이렇게 미처 알지 못했던 장미 가족의 이야기가 마음에 닥치기 시작하자 ‘나’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프탈레이트 가소제 이야기는 밀어놓을 수 있는, ‘당장 죽지 않는’ 것이지만. 장미네 이야기는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 장미 동생이 되고 싶었는데, 그런 장미 동생이 모두가 ‘괜찮겠지’ 생각했던 낡은 버스가 폭발하며 죽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나의 일이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느새 형편없는 어른이 돼버린 것에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을 걷는다. 그렇게 걸으며 돌을 찾는다. 회사를 신고했다는 이유로 담장에 돌 하나를 쌓은 나는 무엇인가 고민에 빠진다.
우리는 당장 내 앞에 일어나지 않은 일에 굉장히 둔감한 경향이 있다. 아침 뉴스에서 바다 건너 어느 나라에서 산이 무너져 수천명이 이재민이 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와도 ‘안타깝다’는 감정을 넘어서지 않는다. 바다를 건널 필요도 없다. 당장 내가 사는 땅에서 일어난 사고라도 내 앞에 닥친 일이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듯 그냥 넘기고야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깃집 연기에 화가 난 김모, 홧김에 아래층 영풍갈비 사장을 눈삽으로 구타” 따위 뉴스가 설령 흘러나온들 얼마나 길게 화를 내고 공감하고 공분하나, “저놈 못 써먹을 놈이구만, 당장 감방에 안 넣고 뭐하나” 하고서 바쁜 일상으로 무던하게 빠져나가기 일쑤다.
강남 한복판에서 유독 가스가 누출돼 사람 몇 명이 다쳤다고 해도 그 당사자가 내가 아니면 반나절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시청역에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교통 사고가 있었다. 원인이 차량 불량인지 실수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건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음 아픈 것은 우리가 ‘평상을 부수고 집에 돌담을 쌓은’ 사람들에 대해서 또 곧잘 잊어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어차피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괜찮을 테니까. 내리는 비만큼이나 정말 비릿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