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이크 크롤러>
TV에는 정말 진짜처럼 보여요.
- 루이스, 영화 <나이트 크롤러>
영화 <나이트 크롤러>의 주인공 루이스 블룸은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이 철조망이나 맨홀 뚜껑을 훔쳐서 연명하는 신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교통사고 현장을 지나다가 기자가 아닌 사람들이 카메라로 현장을 촬영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일명 ‘나이트 크롤러’라고 불리는 자들로서 심야에 발생하는 교통사고나 범죄사건 현장을 찍은 영상을 방송사에 팔아먹고사는 프리랜서 촬영기사들이었다. 이에 영감을 받은 루이스는 무전기와 캠코더를 구입한 후 자신도 특종을 찾기 위해 밤거리로 나선다. 경찰의 긴급 무선을 듣고 달려간 곳에서 차량 강도의 총격에 피 흘리는 피해자의 적나라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데 성공한다. 영상을 팔기 위해 LA의 지역 방송사인 KWLA에 가져가는데 보도국장 니나는 그가 가져온 영상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면서 시청자들은 도시에 만연한 범죄를 다룬 기사에 관심이 높다고 루이스에게 귀띔해준다. 이때부터 루이스는 본격적으로 강력사건과 사고 현장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더 자극적인 장면을 담기 위해 피해자의 가정에 무단으로 침입하기도 하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피해자의 시신을 마음대로 옮기기도 한다. 방송사와의 계약기간 만료를 앞두고 시청률을 올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니나는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영상을 가져오라고 루이스를 재촉한다. 어느 날 살인사건 현장에 경찰보다 먼저 도착하게 된 루이스는 카메라를 들고 집안 여기저기를 누비면서 총상을 입고 죽어 있는 피해자들을 촬영한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피해자를 발견하지만 구조하지 않고 그대로 현장을 빠져나온다. 루이스는 현장에서 도주하는 범인의 차량번호를 촬영했지만 경찰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엄청난 특종을 기획한다.
우리의 일상은 각종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들로 채워져 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켜고 포탈에 뜬 인터넷 기사부터 확인한다. 시리얼을 입에 떠 넣으면서도 눈과 귀는 TV 속 아침 뉴스를 향한다.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에 설치된 모니터의 하단에는 자막 기사가 쉴 새 없이 흐른다. 페이스북에 들어가면 페친들이 공유한 뉴스 기사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늦은 오후엔 카페에 앉아 최근 구독하기 시작한 유튜브 채널이 전하는 뉴스를 시청한다. 그 속에는 범죄 관련 기사들도 자주 등장한다. 살인사건의 현장과 살인범의 얼굴이 화면을 채운다. 전문가 패널들은 범죄자의 심리를 낱낱이 파헤치고 범행 과정과 수법을 자세히 묘사해준다. 시신 훼손, 사이코패스, 둔기와 같은 단어들이 들릴 때마다 자동으로 연상되는 잔혹한 장면들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동시에 나와 내 가족이 그런 잔혹한 범죄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런데 만약 대중매체가 시청자들의 반응을 유도하고 심지어 조작하고 있다면 어떨까? 일반적으로 뉴스 미디어는 실재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서 대중에게 전달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뉴스가 보도하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이트 크롤러>는 이러한 우리들의 믿음을 순진하다고 비웃기라도 하듯 화면 뒤 감춰진 미디어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를 보다 보면 미디어가 더 이상 리얼리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미디어는 단순히 리얼리티를 보도하는데 그치지 않고 리얼리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거나 심지어 스스로 리얼리티를 생산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리얼리티는 시청자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KWLA 방송국을 찾은 루이스는 뉴스 배경인 LA 야경사진을 바라보며 감탄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TV에는 정말 진짜처럼 보여요!” 미디어가 생산한 리얼리티는 실재보다 더 리얼하다. 더 진짜처럼 보여야 더 잘 소비되기 때문이다.
영국의 범죄학자 제프 페럴(Jeff Ferrell)은 범죄행위와 범죄자가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문화현상이 된 범죄는 단일한 의미에 고정되지 않는다. 그 대신 미디어 생태계를 끊임없이 운행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간다. 사실 사회구성주의 입장에 서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회현상이란 없다. 실재는 사회적으로 창조되며 그 현상을 정의하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에 불과하다. 사회현상은 사람들의 주관적인 해석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뿐이다. 사회현상의 하나인 범죄도 마찬가지다. 뉴스 방송, 영화, 드라마, SNS, 팟캐스트를 통해 범죄행위와 범죄자 그리고 범죄통제방식을 둘러싼 집합적 의미들이 형성되고, 이해되고, 소비된다. 범죄의 의미는 더 이상 법전 속에 정체되어 있지도 않고 법학자와 법률가의 전유물도 아니다.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린 범죄현상은 미디어, 대중 그리고 형사사법기관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의미가 보태지고 변형된다. 그 과정에 문화적으로 생성되는 범죄에 대한 불확정적이고 모호한 이미지와 기호들이 바로 범죄의 리얼리티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탈근대 사회를 기호가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가치들이 기호와 이미지에 의해 대체되는 현상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기호와 이미지의 본래적 기능은 어떤 실재하는 대상을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탈근대 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지시·재현 관계로부터 기호와 이미지가 해방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심지어 인과관계가 역전되면서 기호가 거꾸로 대상을 창조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제 기호의 작용은 ‘대상을 꾸며내는 것, 보다 심화된 모형을 통해서 조작하는 것,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허구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기호와 이미지로 창조된 실재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의미에서 ‘초과 실재’(hyperreality)라 불린다. 탈근대 사회 속 우리의 삶은 바로 진짜보다 더 리얼하고 원본보다 더 오리지널 한 초과 실재에 둘러싸여 있다.
영화 <트루먼 쇼>를 통해 이러한 탈근대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트루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현재까지 한 방송사의 리얼리티 쇼의 주인공으로 살아왔지만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여태껏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마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촬영장이라는 사실도, 부모와 아내 그리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연기자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 학창 시절 여자 친구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폭풍우로 인해 아버지가 목숨을 잃어야 했던 사건의 모든 기억들조차 방송사가 연출한 허구일 뿐이다. 트루먼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기억들은 모두 가공된 것이다. 트루먼이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가 허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리얼리티 쇼의 주인공 트루먼의 삶 속에 정작 리얼리티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은 기호나 이미지가 초과 실제로 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뮬라크르는 시뮬라시옹의 결과물로서 실재하지 않는 대상물을 실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을 말한다. 일찍이 플라톤은 모든 사물의 본질 또는 원래 형상인 이데아만이 완벽한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오직 이성적 사유를 통해서만 이러한 이데아의 존재에 다가갈 수 있다. 반면 우리가 보고 만지는 대상들은 단지 이데아의 그림자 같은 것으로, 사물의 본질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모든 사물은 원본인 이데아의 복제에 불과하다. 복제는 이데아를 흉내 내었기 때문에 원본과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비록 불안전하지만 어느 정도의 실재성도 지닌다. 그런데 시뮬라크르는 이러한 복제를 또다시 복제한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화가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꽃그림을 그리면 꽃은 이데아의 복제이고 꽃그림은 시뮬라크르다. 화가는 현실의 꽃보다 더 아름답게 그리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원본인 이데아로부터 멀어지고 실재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가 이데아를 혼란에 빠뜨리는 나쁜 복제라고 비판한다.
시뮬라크르는 모방의 과정에 만들어지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원본은 사라지고 복제만 남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가 ‘원본이 없는 복제’라고 말한다. 플라톤주의 하에서는 원본인 이데아가 언제나 우위를 차지하고 시뮬라크르는 어디까지나 원본의 그림자에 불과했었다. 어떤 경우라도 원본이 전제될 때 복제에 대해 거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에 이르러서는 복제가 원본을 집어삼킨 뒤 왕위를 차지해 버리고 만다. 기호와 이미지는 더 이상 실재를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 대신 실재의 지위를 차지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뮬라시옹의 세계 속에서 실재란 일종의 파생 실재이다. 원본으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합성된 실재이다. 그러나 그 세계 속에 속한 대중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모든 기억이 만들어진 파생 실제로 채워졌지만 그런 사실을 본인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실재는 이제는 조작적일 뿐이다. 사실 이것은 더 이상 실재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상상세계도 더 이상 실재를 포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는 대기도 없는 파생 공간 속에서 조합적인 모델들로부터 발산되어 나온 합성물인 파생 실재이다. 그 휘어짐이 실재나 진실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열리고 모든 지시 대상은 소멸되어 버린다. 곧이어 사라진 지시 대상들이 기호 체계 속에서 인위적으로 부활됨에 의해서 시뮬라시옹은 더욱 강화된다.
- 장 보드리야르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인간과 복제인간 레플리칸트의 공존 가능성에 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레플리칸트는 애초에 우주의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할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인간과 동일한 지적능력에 더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갖고 있지만 수명이 4년에 불과하다. 주인공 데커드 형사는 식민지 행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지구로 잠입한 레플리칸트를 찾아서 제거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레플리칸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은 생명을 연장받아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만든 박사로부터 생명연장이 기술적 한계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절망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창조자인 박사를 죽여 버린다. 복제가 원본을 제거한 셈이다. 시뮬라크르에 의한 이데아의 제거라고도 말할 수 있다.
레플리칸트는 처음부터 성인의 모습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입력되어 있지 않다. 그로 인해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이런 특징은 레플리칸트를 식별해내기 위한 검사에 활용된다. 하지만 영화 속 레플리칸트는 오히려 인간보다 감정이 더 풍부하고 더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레플리칸트의 제작사인 타이렐 사의 모토가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이다. 그래서일까? 복제인 레플리칸트가 원본인 인간보다 더 원본다워 보인다.
후속작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인간에게 순종적인 신형 레플리컨트가 만들어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들은 레플리컨트를 영혼이 없는 껍데기라고 조롱한다. 뱃속에서 태어나는 인간들과 달리 레플리컨트는 공장에서 제작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레플리컨트보다 우월한 존재인 이유는 오직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태어나는 존재는 오리지널 한 원본이다.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에 축적된 기억들은 그 사람만이 간직한 고유한 역사이다. 그래서 인간은 고유한 존재이다. 이에 반해 레플리컨트는 처음부터 성인으로 만들어져 다른 인간의 기억을 이식받는다. 고유한 기억이 대신 가공된 기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인간과 레플리칸트의 구별은 어린 시절 기억이 진짜인지 혹은 가짜인지에 달렸다.
그런데 어느 날 땅 속에서 출산의 흔적이 있는 레플리컨트의 유해가 발견된다. 레플리컨트가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은 세상의 근본 질서를 송두리째 뽑아버릴 만한 충격적인 사건이다. 원본인 인간과 복제인 레플리컨트 사이의 구별이 모호해질 뿐만 아니라 복제로부터 원본이 생겨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진짜가 가짜를 낳았지만 이제는 가짜가 진짜를 낳는 상황이 된 것이다.
탈근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호와 이미지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무수한 기호와 이미지가 도처에 범람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합성되어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연결되어 하나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실재를 대체한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실재가 이미지와 기호의 안갯속으로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유명 연예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알고 보면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뭉치에 불과할지 모른다. 우리가 열광하는 대상은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이다. 종종 이미지는 실재와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근거를 상실한 이미지, 원본이 없는 복제인 시뮬라크르가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욕망을 충족시킨다. 유명 아이돌이 입은 것과 똑같은 옷을 입고 싶은 욕망은 아이돌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싶은 마음이다.
몇 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본사를 둔 한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가 서울시에 1호점을 오픈했다. 당시 언론에는 커피숍에 들어가기 위해 새벽부터 길게 줄지어 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도되었다. 사실 거기에 줄 선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은 한 잔의 아메리카노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지를 원한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은 앞 다투어 인증샷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바쁘다. 사람들이 소비하는 대상은 푸른 병 모양의 브랜드 로고, 그리고 여기에 덧씌워진 ‘최신 유행’, ‘핫플레이스’, ‘핵인싸’의 이미지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가 미국 사회의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미국 사회 전체가 이미 초과 실재와 시뮬라크르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에서 마치 디즈니랜드만이 허구적이고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모두 실재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넘쳐나는 이미지로 인해 점차 실재가 실종되어 듯하다. 근거를 상실한 이미지가 자꾸만 실재를 감춘다. 이미지가 실재를 집어삼켜 버린 세상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인공과 가상의 이미지에 갇힌 채 살아간다. 이미지가 휘두르는 폭력 앞에 인간은 실재로부터 강제 분리되어 허구의 세계 속에 편입되어 버렸다.
프레이밍(framing)은 미디어가 가공된 실재를 생산하고 유포할 때 사용하는 기법 중 하나이다. 프레이밍은 주어진 상황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도록 대중을 유도할 목적으로 사용된다. 어떤 문제의 특정한 측면에만 주의를 집중시키고 나머지 부분은 애매모호하게 만들거나 아예 배제해 버리는 방법을 뜻한다. 뉴스를 보도하는 측이 어떤 프레임을 채택하는지에 따라 전달되는 콘텐츠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마치 사진기사가 피사체를 촬영할 때 어떠한 각도에서 얼마만큼의 줌으로 어느 부위를 포착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사진이 찍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디어가 범죄현상을 다룰 때 적용하는 프레임은 주어진 문제를 정의하고 원인을 분석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며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법이 너무 약하다’ 프레임으로 범죄문제를 다루게 되면 낮은 형량과 관대한 재판부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청소년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소년법을 폐지하자거나 형사미성년 연령을 낮추자는 주장들이 이러한 프레임 속에서 힘을 얻는다.
영화 <나이트 크롤러>에는 미디어가 프레이밍을 사용하여 범죄사건의 리얼리티를 가공하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프리랜서 촬영기사가 된 루이스는 어느 날 집안에 총탄이 날아드는 피해를 당한 한 가정집을 취재한다. 그는 현장에 도착한 후 주인 몰래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가족사진을 촬영한 뒤 곧바로 창밖에서 두려운 얼굴을 한 채 아기를 안고 있는 부부 쪽으로 카메라를 옮긴다. 그때 창문을 관통한 총탄의 흔적과 놀란 가족의 모습이 겹치도록 촬영한다. 바로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의 일상을 위협하는 범죄’라는 프레임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더 나아가 보도국장 니나는 루이스가 찍어온 영상을 검토하다가 얼마 전 발생했던 다른 범죄들과 한데 엮어 ‘날로 심각해져 가는 도시범죄’라는 프레임을 불현듯 생각해낸다. 따로 떼어놓으면 각각 평범한 사건들이지만 이들을 하나의 프레임 속에 배치할 때 시청자들을 자극할만한 뉴스거리가 만들어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디어가 실재를 가공할 때 사용하는 또 다른 기법으로 프라이밍(priming)이 있다. 미디어가 특정 주제를 다룰 때 어떤 정보를 특별히 부각할지에 관한 문제다. 프라이밍은 특정 사회현상에 관해 이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태도, 믿음, 선입견 등을 촉발시킬 목적으로 활용된다. 범죄문제의 원인과 해결방법에 대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평소엔 마음속에 가라앉은 채로 있는데 미디어를 통해 범죄 기사를 접하는 순간 수면 위로 떠오른다. 미디어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 범죄에 대한 대응방식에 관해서는 크게 보면 개인 책임을 강조하는 엄벌 위주 정책과 사회 환경의 영향에 초점을 맞춘 선도 위주 정책이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뉴스가 청소년 범죄사건을 보도하면서 범행의 잔혹성과 피해의 심각성을 부각한다면 어떨까? 당연히 시청자들의 생각이 청소년 범죄에 대한 엄벌주의 쪽으로 흐를 것이다. 시청자들의 마음에 선도와 엄벌의 두 입장이 공존하고 있었더라도 미디어가 사건의 특정 측면을 부각하면 ‘선도’가 아닌 ‘엄벌’이 선택되어 인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이트 크롤러>에도 시청자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한 프라이밍 기법이 등장한다. 니나는 시청자들의 주의를 끌고 관심을 붙들어 두기 위해 살인사건 현장에 끔찍하게 죽어 있는 피해자들의 모습을 아침 뉴스 속보로 내보낸다. 잔인한 범죄현장을 보여줘 범죄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TV를 통해 총격을 당해 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피해자들을 보는 순간 잠들어 있던 두려움이 깨어나고 악몽은 현실이 된다. 뉴스 화면 하단에는 ‘공포의 집’이라는 타이틀이 대문짝만 하게 걸린다. 카메라는 집안 곳곳을 누비면서 피로 물든 참혹한 범죄현장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카메라가 피해자의 시신 위에 멈춘 바로 그 순간 니나는 다급하게 방송 중인 뉴스 앵커를 연결한다. 그리고는 아직까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범인이 지금 이 순간 도시의 거리 속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다는 멘트를 넣으라고 앵커에게 요구한다. 뉴스 앵커는 니나가 요구한 말에 덧붙여 피해자 가정이 LA에서 가장 부유하고 치안이 좋은 지역에 위치해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뉴스 화면과 앵커의 멘트가 향하는 목표점은 분명하다. 바로 시청자 내면에 잠든 공포심이다. ‘나와 내 가족이 살고 있는 이 도시 어느 곳도 결코 범죄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라는 공포심. 이런 공포심에 불이 켜지는 순간 범죄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닫히고 만다.
나중에 평범한 가정에 침입한 강도들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집주인이 마약거래와 연루되어 발생한 사건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니나는 사건의 실체를 시청자들로부터 숨기려 한다. 그녀에게는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프레이밍과 프라이밍을 거쳐 가공된 이야기가 오히려 팩트에 가깝다. 그리고 어느새 가공된 실재는 대중들의 마음속에 리얼리티로 자리 잡는다. 복제가 원본을 집어삼켰고, 하이퍼 리얼리티가 리얼리티를 대체해버린 것이다.
미디어가 전달하는 정보 속에는 진짜와 가짜, 픽션과 논픽션, 원본과 복제가 뒤섞여 있다. 일반인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범죄에 관한 정보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허위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에 등장하는 수사팀은 완벽에 가까운 증거물을 찾아내 자칫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들을 척척 해결하는 활약을 펼친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드라마 속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믿어버린데 있었다. 드라마의 영향을 받은 배심원들이 현실의 재판에 참여해서 드라마에서 본 것과 같은 결정적인 범죄 증거가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만약 법정에 제출된 증거가 자신들이 기대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범죄자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현상을 ‘CSI 효과’라고 부른다. 더 놀라운 점은 법률 전문가인 검사나 변호사조차 재판정에서 드라마 속 내용을 마치 사실처럼 인용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CSI 드라마의 인기비결은 리얼리티가 살아있어서다. 그러나 사실 현실의 과학수사는 드라마가 묘사하는 모습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화려한 첨단 포렌식 장비도, 최고 수준의 전문성을 갖춘 인력도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구 미제가 될 뻔한 사건을 완벽에 가까운 증거로 범인을 검거하는 대반전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CSI 드라마의 리얼리티는 단지 가공된 리얼리티일 뿐이다. 경찰의 실제 수사과정을 최대한 사실에 기초해서 만들어 낸 픽션이다. 실재와 허구는 마치 하나의 순환고리처럼 물고 물리는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하다. 실재가 허구를 낳고 허구가 다시 실재를 낳는다.
이런 현상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미국 파라마운트 방송사의 <캅스>는 실제 사건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찰의 법집행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현장 상황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전달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시청자들 사이에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사실 프로그램 속 리얼리티는 경찰관서와 방송사 촬영팀이 상호 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만들어가는 합작품에 가깝다. 경찰관과 시민과 접촉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당사자들은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리얼리티는 변형되거나 훼손된다. 카메라 앞에 선 경찰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부각하고 드러내기 싫은 모습은 감추려 한다. 때로는 방송사 촬영팀이 현장 상황에 직접 관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촬영 전 경찰관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달라고 미리 요구하거나 도주차량의 추격 장면을 찍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역으로 제작진은 사전에 경찰 측과 상의를 거쳐 그들의 요구가 반영된 촬영 가이드라인을 만든다.
방송사와 경찰 양측의 필요가 적절히 어우러져 설정되고 편집된 장면들이 리얼리티 쇼의 간판을 붙이고 방송을 타는 셈이다. 그 속에 리얼리티는 결여되어 있고, 거의 연기에 가까운 경찰관들의 활동과 선별된 현장 상황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캅스 방송영상들 중 ‘베스트’ 영상만을 추린 편집본이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데 놀랍게도 어떤 경찰서는 이런 영상들을 신임경찰관 교육용 자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 지구대 경찰관들의 현실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평가받은 <라이브>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하지만 드라마적 요소가 가미되었기 때문에 실제의 경찰활동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데 현직 경찰관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정에 <라이브>에서 가져온 영상자료가 사용되기도 했다. 실재를 바탕으로 창조된 픽션이 실재로 둔갑하고 더 나아가 실재에 영향을 준다. 우리가 믿고 있는 리얼리티는 이러한 순환적 영향관계 어디쯤엔가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 <아메리칸 싸이코>의 주인공 페트릭 베이트만은 뉴욕시 월스트리트 투자은행에 근무하는 27세의 여피이다. 하버드 출신에 매력적인 외모를 갖춘 성공한 은행원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숙이 주체할 수 없는 살인 욕구를 감춘 채 살아가고 있다. 피부 노화를 막기 위해 온갖 기능성 화장품을 얼굴에 정성껏 바르고 규칙적인 홈트레이닝을 통해 누구나가 부러워할 만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항상 유명 브랜드 옷만 입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완벽하게 세팅된 음식을 즐긴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인종차별, 핵무기 철폐, 기아 방지 등 각종 시사문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뽐낸다. 이처럼 화려한 외양과 달리 그의 삶의 내면은 너무도 공허하기 짝이 없다. 회사에 출근해서 그가 하는 일이라곤 포르노 잡지나 뒤적거리다가 비서를 시켜 저녁 약속을 잡는 정도다. 다이어리 속 일정표는 간간히 저녁 약속만 눈에 띌 뿐 대부분 텅 비어있다. 부유층 자제들과 둘러앉아 유쾌하게 나누는 대화 내용도 알고 보면 무의미하기만 하다. 입고 있는 브랜드 양복을 서로 칭찬해주거나 누군가 유명 레스토랑에 저녁 예약을 잡았다는 소리에 부러움의 탄성을 지른다. 서로의 명함을 비교하면서 재질과 글자체의 미세한 차이에 열중한다.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인간의 삶이 점점 상품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삶의 영역마다 상품화가 진행되면서 탈근대사회 인류는 온통 상품과 서비스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샘솟는 소비욕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욕망하는 대상은 사실 상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상품을 뒤덮고 있는 이미지라는데 탈근대 사회 소비의 특징이 있다. 특정 상품의 스타일이나 상품의 소비에 부여된 의미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명품 브랜드 양복을 입고 싶을 때 진정 원하는 소비의 대상은 ‘양복’이라기보다 ‘명품 브랜드’다. <아메리칸 싸이코>에는 예약 잡기가 극히 어렵다는 ‘도르시아’라는 이름의 상류층 레스토랑이 등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저녁 식사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대상은 도르시아의 잘 익힌 스테이크가 아니다. ‘도르시아’ 이름 그 자체와 고급스럽고 화려한 이미지다.
이미지를 소비하는 심리 기저에 과시욕구가 깔려 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19세기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B. Vebren)도 당시 유한계급들의 소비행태를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고 표현한 바 있다. 당시 상류층들은 실질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뽐낼 목적으로 소비했다. 물질의 소비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과시적 소비는 과거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확산 속에 소비문화가 등장했고 소비행위는 현대인의 필수적 덕목처럼 예찬되고 있다. 그 속에서 문화적 행위로서의 소비는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개인과 개인을, 집단과 집단을 구별 짓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이러한 ‘구별 짓기’가 단순히 집단 간 문화의 객관적 차이를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규범적 차원의 우열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즉 나의 문화가 너의 문화보다 더욱 훌륭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소비문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소비하는 대상과 소비방식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 구별 짓기 전략이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탈근대 사회의 대중에게서 나타나는 소비심리 자체가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기 드보르(Guy Debord)는 자본가들이 스펙터클을 통해 대중과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다고 비판한다. 스펙터클은 한마디로 시각적인 볼거리를 말하는데 겉에 드러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어떤 대상을 의미한다. 드보르는 현대인의 삶이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세워져 있고 우리의 삶과 의식이 이미지에 의해 점령당한 채 실재의 모습을 상실했다고 분석한다.
드보르가 말하는 스펙터클은 일종의 압축된 이미지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사람들의 존재방식은 어떤 면에서 압축된 이미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SNS와 브이로그에 올라온 수많은 사진, 동영상, 게시글, 댓글, 이모티콘 등이 하나의 이미지로 뭉쳐져 우리 자신을 대표한다. 사람들의 의식과 욕망도 대중매체가 전달하는 스펙터클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다. 예를 들어, TV나 유튜브의 인기 콘텐츠인 ‘먹방’은 먹거리를 볼거리로 전환시켜 시청자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차려진 음식의 화려한 비주얼과 음식을 맛 본 출연자의 격한 표정과 리액션이 음식의 맛과 향기를 대신한다. 먹방을 즐기는 시청자들이 욕망하는 대상은 바로 스펙터클이다. 방송을 타고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이미지들의 덩어리가 욕망의 지향점이다.
이미지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소비와 소유를 향한 욕망을 부추기지만 사실 그 속에는 대상의 실재성이 결여되어 있다. 알고 보면 사람들이 욕망하는 대상은 환상이고 껍데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훨씬 지속적이며 강력하다. 실재하는 대상은 그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 하지만 욕망의 대상이 신기루처럼 실재하지 않는 환상일 때에 만족이란 영영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스펙터클에 만족하지 못하고 금방 또 다른 스펙터클로 눈길을 돌린다. 이렇게 궁극적 만족은 끊임없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스펙터클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자아는 세계의 현전-부재로 에워싸여 진압된다. 또한 스펙터클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가상의 조직이 믿게 하는 허위의 실질적인 현전 아래 경험된 모든 진리가 억압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신과 소원해진 운명을 수동적으로 매일 감내야 하는 사람은 마법적인 기술에 도움을 청하면서 이 운명에 눈속임으로 반응하는 광기를 향해 내몰린다... 소비자가 느끼는 모방의 욕구는 바로 자신을 철저하게 박탈하는 모든 측면에 의해 조건 지어진 유아적인 욕구이다.
- 기 드보르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서 정신병리적 증상들이 발현된다. 인간은 허위적이고 피상적인 껍데기를 자신의 실체로 여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내적 공허와 주체의 분열이 가속화될 뿐이다. <아메리칸 싸이코>의 패트릭은 자신의 외모를 치장하는데 극도로 정성을 쏟는 반면 내면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허상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저기에 패트릭 베이트만의 허상이 있다. 추상적인 무엇이지만 실재하는 나는 아니야... 당신은 나와 악수하고 당신의 손을 붙잡는 살을 느끼겠지만 나는 그곳에 없어.
- 패트릭의 독백, 영화 <아메리칸 싸이코>
소비사회는 거울 세계를 창조했다. 그 거울 속에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와 구별되지 않는 가공의 이미지와 환영이 비칠 뿐이다. 패트릭의 인격성은 소비문화와 미디어로부터 수용한 이미지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래서 참된 내면의 자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소비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인간은 한낱 시각적 이미지로 전락하고 내용물이 없는 텅 빈 껍데기처럼 되어간다. 점점 실재성과 고유성을 상실한 인간들이 마치 살아 있는 유령처럼 떠돈다. 이미지에 주체성을 빼앗긴 인간들은 세상과 현실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삶의 터전으로 분리된다. 패트릭의 일상을 반영하는 다이어리가 언제부터인가 텅 비어있다. 그의 삶이 현실로부터 아주 멀어져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체들이 만들어 가는 인간관계도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패트릭과 주변 친구들 사이에는 의미 있는 연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남과 대화는 소비사회가 창조한 이미지와 기호를 중심으로 겉돌 뿐이다. 소비주체로서 자신의 탁월성을 뽐내기에 바쁘다. 누가 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기호를 지니고 있는지에 따라 우열이 정해진다. 패트릭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유일한 목적은 그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보다 더 나아 보일 때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명함이 자신의 것보다 더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불타는 듯 질투심을 느낀다. 부유층 자제 중 한 명이 레스토랑 도르시아를 쉽게 예약할 수 있다고 자랑하자 질투심에 그를 집으로 불러들여 도끼로 잔혹하게 살해하기도 한다.
더 이상 넘어야 할 장벽은 존재하지 않아. 통제 불능인 자, 정신이상자, 악질적인 자, 악마 같은 자, 내가 저지른 무자비한 살인과 나의 완전한 무관심, 이 모든 것을 나는 이제 초월했어. 나의 고통은 끊임없으며 격렬해. 누구에게도 더 나은 세상이 되길 원하지 않아. 사실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해지길 원할 뿐이지. 아무도 이 고통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길 바랄 뿐이야. 그러나 이렇게 모든 걸 인정한 후에도 카타르시스는 느낄 수 없어. 내가 받아야 할 처벌은 계속 나를 피해 다닐 것이고 나도 나 자신에 대해 더 깊은 깨달음을 얻지 못해. 말하는 가운데 뭔가 새로운 깨달음이 생겨나지도 않아. 사실 이러한 고백도 아무런 의미가 없지.
- 패트릭의 독백, 영화 <아메리칸 싸이코>
껍데기뿐인 패트릭의 공허한 삶은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채워진다.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살해한 뒤 시체를 집안 구석구석에 보관한다. 욕조 안에도, 옷장에도 시체들이 즐비하다. 영화 속 그의 살인행위는 채워지지 않는 소유욕구의 표출처럼 보인다. 패트릭은 탈근대사회 속 이미지 소비자로 전락한 인간을 대표한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 있는 살인 욕구는 상품 구매욕구의 비유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옷걸이에 걸어놓은 시체는 패트릭이 구매한 상품들이다. 실재성이 결여된 이미지와 기호를 소비하는 것처럼 패트릭은 생명력을 상실한 육신을 미친 듯이 소비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살인 욕구는 더 강렬해질 뿐이다. 패트릭이 점점 시리얼 킬러로 변해가듯 현대인들은 ‘시리얼 커스토머’(serial customer)가 되어 간다.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좇는 것처럼 이미지 소비에 탐닉할수록 의미 있는 인간관계로부터 점차 멀어져 간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점차 멀어진다. 점점 사이코가 되어 간다.
참고문헌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유재홍 옮김(울력, 2014)
플라톤, 「소피스트」, 이창우 옮김(아카넷, 2019)
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철학」, (문학과 지성사, 1996)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박홍규 역(문예출판사, 2019)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01)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최종철 옮김(새물결, 2005)
Jeff Ferrell, Keith J. Hayward, & Jock Young, Cultural Criminology: An Invitation (Sage,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