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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폴 Oct 19. 2020

패배하는 전쟁, 승리하는 자들

영화 <내부자들>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 나가겠습니다... 모든 외근 경찰관을 무장시켜서 범죄와 폭력에 대해 정면으로 대응토록 하겠습니다... 흉악범과 우범자에 대해서는 온정주의적인 이러한 형사정책을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와 관련한 입법과 또 법률 집행에 있어서 국회와 법원의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합니다. 

                         

- 노태우 대통령, 10·13 특별선언, 1990년




영화 <내부자들>의 주인공 우장훈은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 소속 검사이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어떻게든 출세하려고 기를 쓰는 인물이다. 대선을 앞둔 시점, 청와대 민정수석의 지시로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장필우에 대한 불법선거자금 사건을 진행한다. 장필우가 한결 은행에 압력을 행사해 재벌기업인 미래 자동차가 거액의 불법대출을 받도록 해 주고 그 대가로 미래 자동차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다. 그런데 이 사건의 배후에는 유력 일간지 조국 일보의 주간 이강일이 있다. 변호사였던 장필우를 발굴해서 정치무대에 데뷔시키고 미래 자동차의 오현수 회장을 스폰서로 붙여줘 대통령 후보로 키워 온 사람이 바로 이강일이다. 그의 수하에는 정계와 재계의 각종 지저분한 일들을 처리해주는 정치깡패 안상구가 있다. 이강희의 지시로 미래 자동차 비자금 사건의 뒤를 봐주던 중 안상구는 우연히 비자금 파일을 입수한다. 안상구는 후일을 대비해 자신이 친형처럼 믿는 이강일에게 비자금 파일 복사본을 맡기지만 배신을 당하고 오 회장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손목을 잘린 뒤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나중에 병원을 나온 안상구가 복수극을 준비하는데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우장훈 검사가 그를 찾아오고 둘은 오 회장과 장필우를 무너뜨리기 위해 손을 잡는다. 

  

두 주인공 안상구와 우장훈은 통상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는 부류의 인간들이다. 안상구는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주먹 하나로 잔뼈가 굵은 전형적인 뒷골목 깡패다. 우장훈은 과거엔 경찰관으로서, 현재는 검사로서 범죄자들을 붙잡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게 본업인 공무원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두 인물이 한 팀을 이루는 설정은 부자연스러움을 넘어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어쩌다 이들은 어색한 동업관계를 맺게 되었을까? 처음엔 안상구와 우장훈 각자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로가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안상구는 불법 비자금 조성 사실을 폭로해서 자신의 손목을 자른 오 회장에게 복수를 하려 했다. 정의를 논하는 우장훈에게 시니컬하게 일갈한다.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긴 한가?” 우검사도 겉으로는 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제로 그를 이끄는 힘은 출세욕이었다. 빽도 족보도 없는 지방대 출신이 출세를 위해서는 큰 거 한 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동상이몽으로 시작된 동업관계는 안상구가 기자회견을 열어 불법 비자금과 정치자금에 대해 폭로한 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싸움이 적군으로부터 의외의 반격을 당하고 전세가 역전된다. 장필우는 이 모든 게 정치공세라고 방어막을 치고 오 회장은 돈으로 사건 관련자들의 입을 틀어막는다. 이강일은 언론보도로 안상구를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파렴치범으로 몰고 간다. 비로소 우장훈과 안상구는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세력의 거대한 힘을 온몸으로 느낀다. 재벌, 정치, 언론은 철저한 공생관계를 맺고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살인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사회를 망가뜨려온 ‘거대한 악의 축’이 점점 그 실체를 드러내고 누가 진짜 공공의 적인지 분명해진다.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명확해지면서 우장훈과 안상구는 복수심이나 출세욕과 같은 사적인 목적을 초월하여 ‘거악 척결’이라는 새로운 깃발 아래에서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는다. 

  

누가 공공의 적인가? - 영화 <내부자들>


비판 범죄학은 범죄현상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인 앎 자체에 도전장을 던진다. 무엇보다 인간의 인식이 이데올로기, 프로파간다, 대중문화 등 외부 영향에 의해 쉽게 조작될 수 있다는 한계를 지적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도대체 어디까지 진실인가?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내가 실제로 믿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로 하여금 믿기 원하는 대로 내가 믿고 있는 것인가? 영화 ‘내부자들’의 조국 일보 이강일 주간은 ‘말이 권력이고 힘’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신봉한다. 그에게 대중은 개나 돼지에 불과하다. 비판적 사고가 결여된 채 그저 먹고사는 문제에만 골몰하는 일차원적 존재들이다. 그래서 언론은 말과 글의 힘으로 얼마든지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비자금과 불법 정치자금 폭로 때문에 자신들을 향해 비난여론이 형성되지만 반박 보도를 통해 여론의 칼날을 오히려 고발자에게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비판 범죄학은 범죄현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우리가 팩트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재점검하라고 요구한다. ‘무엇이 심각한 범죄이고 누가 중대한 범죄자인가’의 근본적 물음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지금 우리가 범죄현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들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퍼뜨렸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순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강자들의 교묘한 지배 메커니즘과 사회적 모순의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권력이 된 지식


오늘날 자유는 민주주의가 정착된 사회라면 기본적 권리로서 보장되는 가치다. 우리나라만 봐도 과거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이 자행했던 고문, 납치, 암살과 같은 유형의 국가폭력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걸까?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어떠한 권력의 통제와 지배를 받고 있다. 다만 과거처럼 그러한 권력이 눈에 확연히 드러나거나 신체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물리력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을 뿐이다. 현대 사회 속에서 작동되는 권력은 삶의 모든 영역에 퍼져서 은밀하게 작동한다. 푸코에게 권력은 일종의 관계망이다. 마치 모세혈관처럼 사회 전체에 촘촘하게 퍼져서 개인의 생각, 행위, 태도 속으로 스며드는 일종의 ‘미시권력’이다. 


규율 중심적 권력은 완전히 공개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은밀한 것일 수도 있다. 공개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권력이 도처에서 항상 경계하면서 원칙적으로 어떠한 애매한 부분도 남겨 놓지 않으며 통제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조차 끊임없이 통제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권력이 완전히 ‘은밀해지는 것은’ 그것이 언제나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은밀하게 기능하기 때문이다. 

- 미셸 푸코  

  

그런데 이러한 미시권력은 예전의 노골적인 권력보다 사람들을 통제하는데 더욱 효과적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권력행사의 주체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걸 잘 모른다.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져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미시권력은 사람들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외부로부터의 강압적인 명령 없이도 내면에 장착된 자기 통제 기제에 따라 스스로를 규율한다. 일종의 체화된 권력이라는 점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말하는 ‘아비투스’와 유사하다. 아비투스는 사회의 계급구조가 내재화된 육체다. 지배계급의 권력은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다른 계급의 승인에서 비롯된다. 습관처럼 몸에 배어버린 사회질서는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통해 반복적으로 발현되고 이런 방식으로 지배-피지배 관계는 재생산을 거듭한다. 이러한 행동은 일상생활 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치 개인의 의도와 의지의 산물인 것으로 사람들은 오인한다.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은 겉으로 보이기에는 그냥 평범한 보험회사 직원으로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꿈이 있는데 피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어릴 때 아버지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사건을 겪은 이후 바다 공포증이 생겨서 꿈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의 삶의 이면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비밀이 감춰져 있다. 사실 트루먼은 신생아일 때부터 방송사가 기획한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라고 생활하는 마을은 특별히 설치해 놓은 거대한 할리우드 세트장이고 마을 주민들도 모두 훈련받은 배우들이다. 트루먼의 삶은 방송을 통해 24시간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다. 그의 삶 전체가 거의 전부 각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과 다를 바 없다. 트루먼의 물에 대한 두려움도 그가 감히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제작진이 연출을 통해 인위적으로 마음에 심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가정, 직장, 길거리, 상점 등 어딜 가더라도 감시의 눈과 통제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트루먼의 모든 기억과 행동 속에 연출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하지만 트루먼은 노예와 같은 자신의 처지를 전혀 모른 채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간다. 나중에 그의 삶에 전 방위적으로 작동하는 거대하고 은밀한 권력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푸코는 권력이 지식을 배경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개인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권력은 지식을 통해 작용한다. 어떤 의미에서 지식 자체가 권력이기도 하다. 푸코는 둘 사이의 땔 레야 땔 수 없는 관계를 ‘권력-지식’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지식은 대상을 설명하는 말 또는 담론으로 구성된다. 대상을 원하는 방식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지식이 만들어지고, 축적되고, 널리 유포되어야 한다. 지식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인식되면 강압적 물리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대상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권력은 어떠한 지식을 창출한다는 점이며, 권력과 지식은 상호 직접 관여한다는 점이고, 또한 어떤 지식의 영역과의 상관관계가 조성되지 않으며 권력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권력적 관계를 상정하거나 구성하지 않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미셸 푸코

  

푸코에게 중요한 문제는 지식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누가 어떤 의도로 지식을 생산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18세기와 19세기 유럽에서 발전했던 ‘인간과학’(science of man)은 인간 신체에 대한 통제력을 높여 잘 길들여진 몸을 만들기 위한 권력-지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근대적 교도소 내의 규율과 감시를 예로 든다. 

  

중세시대의 과도하고 비합리적인 신체형 중심의 형벌은 부르주아지의 사법개혁 요구에 의해 징역형으로 대체되었다. 이때부터 교도소는 재소자의 신체를 사로잡아 훈련시켜 정상의 범주 안에 스스로 머무를 줄 아는 ‘착한 몸’을 만드는 목적을 수행했다. 전문가들은 재소자들의 행동을 관찰하여 개인의 범죄성을 개선하고 행동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들을 고안해냈다. 그 결과 재소자는 규율을 최적화하기 위해 조직된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 배치되었다. 촘촘하게 짜진 일과표 위에 재소자들의 24시간과 활동공간이 세밀하게 분할되었다. 재소자들의 행동은 ‘정상적인’ 행동기준에 맞추어 평가되었다. 교도소 중앙부의 탑 꼭대기에서는 감시의 눈이 재소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재소자들은 일방적으로 ‘바라보임’을 당할 뿐 결코 감시자를 볼 수 없도록 특별히 고안된 구조 속에 머문다. 지속적인 규율과 감시 속에서 재소자들은 점차 자기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게 되었다. 지배세력이 의도한 대로 재소자들은 권력관계를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권력에 예속시키게 된다. 

  

범죄학이란 지식체계가 탄생하고 발전하게 된 계기도 상당 부분 교도소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근대적 형태의 교도소가 탄생하기 전에는 주된 관심이 범죄를 저지른 행위자가 아닌 법 위반 행위 자체에 있었다. 그런데 교도소라는 공간에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고립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행위자에게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범죄는 일반인들의 법 위반 행위라기보다 일반인들과 다른 특이성을 가진 개인에 의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초기 범죄학자들은 재소자들이 교도소 밖의 ‘정상적인’ 사람들과 어떤 점에서 얼마나 다른지를 밝혀내는 연구에 골몰했다. 


근대 범죄학의 선구자인 체사레 롬브로소(Cesare Lombroso)의 연구가 시작된 곳도 다름 아닌 교도소였다. 롬브로소와 그의 제자들은 교도소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 간의 공통적인 특징을 밝혀 범죄의 원인을 규명하려고 애썼다. 그들의 눈에 재소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지닌 특별한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이 특별한 인간들을 ‘범죄인’(criminal man)이라고 불렀다. 이런 이유로 푸코는 교도소가 범죄자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단순히 일반적 의미의 ‘법 위반 행위자들’이었으나 교도소에 격리되면서 구체적 의미의 ‘범죄자’가 생겨난 것이다. 권력체제는 교도소를 통해 개인의 신체를 외부와 격리시켜 놓고 학자들은 이들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지식을 생산했다. 결국 범죄학도 권력-지식 복합체의 산물인 것이다.

  

권력으로서의 지식은 ‘무엇이 심각한 범죄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범죄학자 스티븐 박스(Steven Box)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심각한 범죄는 모두 ‘이데올로기적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들이 빈번하게 저지르는 행위들이 심각한 범죄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실상 진짜 심각한 범죄는 사회 특권층과 부유층에 의해서 주로 저질러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기업이 운영하는 반도체 공장 직원 수 십 명이 작업 중 발생하는 발암물질에 노출되어 백혈병에 걸려 죽는 사건은 일반적인 살인사건보다 더 심각한 범죄다. 기업인이 회사자금을 수백억 원씩 횡령하는 행위는 일반적인 절도사 건보다 훨씬 심각한 범죄다. 

  

영화 <내부자>의 권력 카르텔이 저지르는 온갖 권한 남용, 뇌물, 여론조작, 정경유착, 사법방해 행위는 피해자 한두 명이 아니라 국가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한 범죄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 최고위층의 범죄들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선적으로 이들의 범죄행위 자체가 베일에 가려져서 일반인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혹여 범죄행위 중 일부가 겉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힘 있는 자들에게 응분의 처벌을 부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반해 하위계층의 범죄는 밖으로 잘 드러날 뿐만 아니라 처벌도 가혹하다. 예전 어떤 국회의원이 횡령사건 판결문 461건을 분석한 결과가 언론을 통해 공개된 적이 있다. 소규모 자영업체 종업원 34명의 평균 횡령액이 636만 원이고 기업체 최고경영자 83명의 평균 횡령액이 46억 원이었다. 그런데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비율은 종업원들이 더 많았고, 반대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비율은 최고경영자들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스티븐 박스는 정치인들과 사법부가 우리 사회의 진정한 범죄자들을 비호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정치인들은 입법과정에서 자신들을 포함한 최상위층들의 범죄행위가 중대한 범죄로 다루어지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사법부는 재판이 힘 있는 자에게 편파적으로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이를 조장하기까지 한다. 그 결과 상위계층의 범죄는 아예 처음부터 형법전의 범죄행위 목록에서 누락되거나, 위법행위가 발각되더라도 처벌을 면하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기 십상이다. 

  

언론도 상위계층의 범죄에 주목하기보다는 하위계층들이 저지르는 소위 ‘거리 범죄’를 부각한다. 전문가 집단도 이러한 ‘신화창조’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범죄학자, 형법학자, 변호사, 프로파일러 등 소위 범죄 전문가들은 각종 방송매체에 등장해서 해당 사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문적 지식으로 사안의 중대성을 객관화해버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사람들 사이에 하위계층의 행위들만이 심각한 범죄로 인식되며, 더 나아가 사회를 위협하는 자들이 대부분 하위계층 속에 존재할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퍼져나간다. 그 결과 사회 공동체의 보호라는 명목 하에 하위계층에 대한 상위계층의 지배와 통제가 더욱 정당화된다.



두려움의 정치학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미래 어느 시점 제3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극우 성향의 독재정권에 의해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억압받고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 어느 날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브이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중앙 형사재판소 건물을 폭파한다. 정부의 지시를 받은 방송국은 붕괴 위험 때문에 건물을 일부러 폭파한 것이라고 부랴부랴 허위 보도를 내놓지만 방송국에 침투한 브이는 생방송으로 자신이 폭파범이라고 세상에 알린다. 그리고 일 년 뒤에 국회의사당을 폭파시킬 계획인데 그때 시민들이 직접 전체주의에 맞서 봉기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한편 브이를 뒤쫓던 형사는 현 독재정권의 탄생과정과 브이의 복수극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된다. 과거에 정부는 반정부 인물, 유색인종, 무슬림 등을 수용소로 끌고 가 생명에 치명적인 바이러스 생산을 위한 생체실험을 했다. 브이도 실험대상자였는데 실험 중 이상반응이 일어나 오히려 강인한 신체적 능력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수용소는 화재로 불타고 브이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탈출해 지금껏 정부를 무너뜨릴 계획을 준비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당시 누군가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정수장에 풀어 8만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는 테러가 발생했는데 그 배후에 바로 지금의 정부가 있다는 점이다.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 전체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정부가 주도한 자작극이었던 것이다. 

  

생체실험에 관여했던 주요 인물들이 하나둘씩 브이의 손에 살해를 당하고 점점 약속의 날이 다가온다. 산발적인 시위가 확산되던 중 한 소녀가 경찰에게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간다. 드디어 약속의 날,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수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를 행진한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국회의사당은 폭발하고 독재정권은 몰락한다.

  

영국의 범죄학자 스탠리 코언(Stanley Cohen)은 어떤 상황, 사건, 또는 특정 집단에 의해 사회의 안녕이나 이익이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대중적 인식을 ‘모럴 패닉’이라고 불렀다. 모럴 패닉의 특징은 대중이 느끼는 두려움이 해당 문제의 객관적인 심각성 수준에 비해 과도하다는 데 있다. 또한 문제에 대한 원인 분석과 대응방식도 객관성과 적정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코언은 모럴 패닉이 형성되는 원인에 있어서 언론매체와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한다. 언론은 과장되고 편향된 보도로 해당 문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끌어 모은 뒤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대중의 염려가 고조되어 히스테리 수준에 이르면 통상 의회는 법 제정, 정부는 법집행을 수단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다. 특히 범죄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법질서 수호라는 레토릭을 대의명분으로 엄벌주의와 강력 대응원칙이 강조된다. 


모럴 패닉은 이성과 상식을 마비시킨다 -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언론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언론이 정부의 나팔수 역할을 담당하고 정부는 언론보도를 지렛대 삼아 정책을 추진한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어떻게 모럴 패닉이 정부와 언론에 의해 조작되고 그 결과가 어떻게 권력자의 이익으로 돌아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권은 전염병 테러사건을 조작해서 시민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불어넣고 겁에 질린 사람들로부터 자유와 권리를 찬탈해 가버렸다. 공공의 안전과 질서유지라는 명목 하에 시민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정부의 감시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브이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시민들의 책임도 크다고 질타한다. 정부 말만 믿고 지나치게 겁을 먹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왜 그런지 압니다. 두려웠던 거죠. 누군들 아니겠습니까? 전쟁, 테러, 질병, 수많은 문제가 연쇄 작용을 일으켜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을 마비시켰죠. 공포에 사로잡힌 여러분은 서틀러 의장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그는 질서와 평화를 약속하며 침묵과 절대복종을 요구했지요. 

- 브이의 생방송 연설, 영화 <브이 포 벤데타> 

  

모럴 패닉은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무마하기 위해 활용되기도 한다. 1970년대 영국 사회는 경기둔화와 실업률 증가 때문에 파업과 폭동이 빈발했다. 경제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로 내몰린 하위직 노동자층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소수민족 노동자들이었다. 생계수단이 막막해진 이들 중 일부가 노상강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언론매체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아프리카계 흑인 남성들의 노상강도 문제에 집중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의 젊은 흑인 남성들을 향한 대중의 두려움이 시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갔다. 모럴 패닉이 발생한 것이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런던 시민들 사이에 강력한 치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경찰은 흑인 남성들에게 단속과 체포를 집중함으로써 이러한 요구에 응답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 기간 동안 노상강도 발생률의 증가 속도는 오히려 10년 전에 비해 둔화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노상강도를 둘러싼 모럴 패닉은 사실 객관적인 근거를 결여했던 것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당시 모럴 패닉이 형성된 데에는 영국 정부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경제위기로 인해 사회 전체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자 정부는 국면을 전환시킬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더욱이 경제위기의 책임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과 한계에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경제문제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흑인 남성들에 의한 노상강도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정부는 언론의 힘을 빌려 이 문제를 이슈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모럴 패닉이 정치적 반대세력을 억압하거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비판의 중심에 ‘범죄와의 전쟁’이 있다. 정치인들은 범죄의 심각성, 사회도덕의 몰락을 부각해 유권자들의 마음에 공포심과 위기감을 불어넣은 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정당이 문제 해결의 적임자라고 자처해왔다. 

  

정치가들의 입장에선 범죄문제를 전쟁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다루는 것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리하다. 첫째, 전쟁에서는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범죄와의 전쟁에서도 소수의 범죄자들과 다수의 시민들 사이에 선명한 경계선이 그어진다. 정치인은 시민들의 편에 서서 범죄자들을 공공의 적으로 지목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다수의 지지자를 확보할 수 있다. 둘째, 전쟁의 목적은 승리이며 이를 위해 적을 굴복시키기에 충분한 무력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힘의 논리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고차방정식은 불필요하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 역시 단순하다.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강력 대처와 엄정처벌을 단순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범죄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내놓기 위해 고심할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전쟁은 한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중대한 사건이다. 그래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이 동원되는 총력전의 양상을 띤다. 범죄와의 전쟁이 수행되면 범죄문제는 여타 이슈들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 결과 전시상황이라는 명목 아래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들은 묵살되고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들은 강제로 봉합된다. 정치인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조건들을 한순간에 덮어버릴 수 있는 거대한 담요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 범죄문제가 본격적으로 정치 이슈로 부상한 시기는 1960년대다.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리처드 닉슨이 범죄문제를 선거공약에 포함시켰다. 1968년 대선에 재출마하여 승리한 닉슨 대통령은 마약 남용을 미국 사회 공공의 적 1호로 지목하고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경찰인력과 치안 예산도 대폭 늘렸다. 경찰은 마약범죄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실시했고 법원은 체포된 마약사범에 대해 엄한 처벌을 부과했다. 바야흐로 ‘법질서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마약 관련 위반자들이 대거 검거되어 교도소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러한 성과는 부수적인 전리품에 불과했다. 실제로 마약과의 전쟁이 겨냥했던 주적은 닉슨의 정치적 반대자들이었다. 흑인 정치운동, 반전운동, 여성해방운동, 동성애자 해방운동 등을 주도하는 세력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특히 닉슨은 전쟁에 반대하는 좌파세력과 흑인들과 싸우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마약과의 전쟁을 동원했고 이들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마약과의 전쟁은 레이건 정부에 이르러 최고조에 이른다.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했던 1980년대에는 속칭 ‘크랙’이라는 신종마약이 크게 유행했다. 코카인 가루를 베이킹 소다와 함께 가열하면 고체 형태의 마약이 만들어진다. 크랙은 잘게 쪼개서 싼 가격에 팔기가 용이해서 흑인 빈민가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1982년 레이건 대통령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미국 의회는 강력한 처벌 법안을 신속히 통과시켰다. 마약범죄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과 검거, 무거운 형량이 그 뒤를 이었고 교도소는 마약사범들로 넘쳐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쟁을 하면 할수록 교도소 재소자 중 흑인, 히스패닉 등 유색인종들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했다. 주된 원인은 크랙 소지죄의 과도한 처벌에 있었다. 새로운 처벌법에 의하면 가루 코카인 소지죄보다 크랙 소지죄의 형량이 거의 백배 높았다. 예를 들어, 크랙 100그램과 가루 코카인 1그램에 같은 형량이 부과되도록 규정한 것이다. 크랙과 가루 코카인은 같은 원료에서 추출되며 약효는 오히려 가루 코카인이 더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형량이 부과되는 중범죄이기 때문에 경찰의 마약단속도 유색인종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크랙 거래에 집중되었다. 일단 마약소지죄로 검거가 되면 중형을 피할 수 없었고 장기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레이건 시대에 전개된 마약과의 전쟁은 유색인종, 흑인 또는 빈민층에 대한 전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쟁은 가난하고 못 배운 수많은 흑인, 히스패닉 남자들을 교도소로 보냈다. 소수민족 지역사회에는 남편, 아빠, 아들을 잃은 가정들이 늘었고 지역경제는 갈수록 쇠락해져 갔다. 전쟁터의 총성과 대포소리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 인종차별 등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미국 사회에서 점차 잦아들고 말았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적이 있다. 1990년 10월 13일, 민생치안을 강화할 목적으로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목소리가 생방송을 통해 흘러나왔다. 주요 타격 대상으로 인신매매, 가정파괴, 조직폭력, 마약, 부정식품 등 5대 사회악이 지목되었다. 전쟁을 수행할 경찰인력을 1만 6천 명 추가 선발하였다. 업소들에 대한 집중단속과 대대적인 검거활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조직폭력배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상당수의 폭력조직들을 와해되었다. 

  

갑작스럽게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배경은 표면적으로는 강력범죄의 급증, 음란퇴폐문화 확산 등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치적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부가 국면 전환용으로 전쟁 카드를 들고 나왔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가 있기 9일 전, 국군 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가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질러 온 불법사찰이 세상에 알려졌다.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탈영하면서 가지고 나온 사찰활동자료를 공개한 것이다. 공개된 자료에는 야당 정치인을 비롯하여 노동계, 종교계의 반정부 인사들을 상대로 보안사가 수집해온 각종 사생활 정보가 담겨있었다. 이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거세게 일어났고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이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난데없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 범죄문제를 뿌리 뽑겠다는 특별선언을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별선언 이면에 정치적 계산이 고려되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다. 

  

사실 전쟁이라는 표현만 쓰지 않았을 뿐 이전 군사정권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를 쇄신해왔다. 1961년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전국에 선포했던 ‘깡패 소탕령’이나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사회악 사법을 소탕하겠다고 실시했던 ‘삼청계획’도 결국 정당성이 결여된 정권이 국민들 사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권위를 인정받으려는 목적에서 실시된 것이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다큐멘터리 영화 <미국 수정헌법 제13조>는 시작부터 몇 가지 놀라운 통계수치를 보여준다. 미국 인구는 전 세계의 5%를 차지하는데 불과하지만 교도소 수감자는 25%에 달한다. 다시 말해 지구 상에서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넷 중 하나는 미국에 있다는 뜻이다. 1972년에 불과 30만 명에 불과했던 수감자 숫자가 2015년에 23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러한 통계수치의 원인은 1970년대 닉슨 정부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마약과의 전쟁이다. 미국 정부가 지금까지 마약과의 전쟁에 쏟아부은 돈이 약 1조 달러(1,200조 원)로 추산된다. 한국 일 년 예산의 세 배에 조금 못 미치는 규모다. 지금도 미국 연방정부는 마약사범을 교도소에 수용하기 위해 매일 920만 달러(100억 원)를 쓰고 있다. 해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마약사범 수감에 쓰는 예산이 총 13억 달러(1조 5천억 원)에 달한다. 

  

그래서 미국의 마약문제는 얼마나 해결되었을까? 지금 이 순간 미국에서는 25초마다 한 명이 마약 소지로 체포되고 있다. 2015년 마약 소지로 체포된 사람만 130만 명이다. 마약과의 전쟁이 본격화된 1980년과 비교할 때 마약 소지로 인한 체포는 3배, 마약 판매는 6배 증가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마약중독 실태는 어떨까?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 약물중독 및 정신 보건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16년 헤로인 또는 마약성 진통제를 오남용 한 미국인 1,180만 명에 달했다. 2017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 마약중독으로 사망한 사람이 7만 명을 넘으며 사망자 숫자는 계속적인 증가 추세에 있다. 미국 사법당국이 저소득층 흑인과 히스패닉 주거지역에서 마약과 전쟁을 벌이면서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 사이 다른 곳에서는 마약성 진통제가 미국인들, 특히 십 대 청소년 사이에 빠르게 퍼져가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진행해온 마약과의 전쟁은 실패한 전쟁이다. 마약중독을 예방하지도, 마약 공급을 차단하지도, 마약 수요를 낮추지도 못했다. 다만 마약과의 전쟁이 거둔 확실한 성과(?)는 교도소 수감자의 숫자를 엄청나게 늘렸다는 점이다. 거의 유일한 전리품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실패한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게오르그 루쉐(Georg Rusche)와 오토 키르히하이머(Otto Kirchheimer)는 처벌을 단순히 범죄행위에 따른 처분이나 범죄에 대한 사회의 반응만으로 보지 않았다. 이들은 처벌제도 속에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통제하기 위한 전략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법에 따라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고 안전한 사회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적 착시현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사람들은 지배계층이 만들어낸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루쉐와 키르히하이머가 말하는 처벌의 진짜 기능은 경제적 상위계층의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이데올로기 속에 감춰진 처벌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역사적 관점에서 처벌방식의 변천과정을 분석했다. 

  

16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방법은 대부분 사형 아니면 신체형이었다. 그러다가 근대시기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처벌 방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갤리 노역’이 있다. 갤리는 노를 젓는 힘으로 움직이는 배를 말하는데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이 노예로 잡혀가 노를 젓던 장면에 등장한다.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사이에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중범죄자와 부랑자들에 대한 처벌로 배에서 노 젓는 일을 강제하였다. 이러한 처벌은 나중에 범선이 등장하여 갤리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른 처벌 방법으로는 유배형이 있었다. 일부 중범죄자들은 식민지로 보내져 부족한 노동력을 메꾸는데 동원되었다. 근대시기의 가장 보편적인 처벌 방법은 징역형이었다. 범죄를 저지른 자뿐만 아니라 떠돌아다니거나 구걸하는 자들까지 붙잡아다가 교도소에 가두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재소자들은 교도소에 갇힌 채 자본가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거의 공짜로 제공하였다. 또한 이렇게 규율과 감시 속에 훈련된 재소자들은 출소 후에 노동시장으로 유입되어 자본가들에게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루쉐와 키르히하이머는 중세 말기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처벌의 방식이 변한 이유가 자본가들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중세 말기 농촌인구가 도시로 대거 이동하면서 무질서와 범죄가 급증하게 되자 부유층의 재산이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자 잔혹하고 과도한 형벌로 범죄자, 부랑자들을 다스렸다. 도심지역에 노동력이 과잉 공급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사형이나 신체형이 무분별하게 부과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이르러 그동안 발생했던 기근, 전쟁, 전염병의 여파로 도시의 인구증가가 급격히 둔화되었다. 그런데 바로 같은 시기에 유럽 각국은 중상주의의 기치를 높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무역항로와 식민지 개척으로 시장이 확대되고 생산과 무역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국내와 식민지 모두 생산에 투입할 노동력이 대거 필요했으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자 사형과 신체형은 현저히 줄고 그 대신 노역 중심의 처벌이 증가했다. 이와 같이 처벌방식이 변한 것은 고전주의 범죄학에서 말하듯이 인권을 중시하는 계몽사상의 영향이 아니라 실상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처벌제도는 또 한 번 큰 변화를 거치게 된다. 기계식 대량생산 체제가 도입되면서 노동력의 가치가 하락했고, 따라서 교도소를 통해 노동력을 공급받을 필요성이 적어졌다. 이런 가운데 사회는 급격히 불안정해져만 갔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인해 대규모 실업과 극심한 빈곤이 이어졌고 범죄율이 치솟았다. 루쉐와 키르히하이머에 의하면 이런 상황 속에서 지배계급이 떠올린 해결방안은 중세 말기의 잔혹한 처벌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계몽주의가 사회 전체적으로 팽배해있었기 때문에 이를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 대신 교도소 구금형의 성격을 바꾸게 된다. 재소자들은 고문이나 위협 속에서 사회와 격리된 채 교도소에 방치되었다. 예전처럼 생산을 위한 노동활동에 투입되거나 출소 후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한 훈련을 하기보다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잉여 노동력을 소진하는데 치중했다. 결국 구금형의 성격이 변한 것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자본계급에게 이익이 되지도 않으면서 사회 불안만 가중하는 남아도는 노동력들을 처리할 폐기장이 필요했다. 교도소에게 부여된 새로운 임무가 바로 폐기처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처벌제도는 어떠한가? 영화 <미국 수정헌법 제13조>는 루쉐와 키르히하이머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미국의 교도소 수감자가 급증한 원인으로 첫 번째 손꼽히는 것 중 하나가 소위 ‘삼진아웃 법’이다. 간단히 말해 중범죄를 세 번 저지르면 종신형까지 처할 수 있도록 만든 법이다. 판사는 법에서 정해 놓은 최소 형량보다 낮게 형을 부과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 주에서 중범죄를 세 번째 저지르면 최소 징역 25년이 선고된다. 삼진아웃이 적용된 장기수가 늘어나면서 교도소 수감자가 증가한 것이다. 


형벌은 누군가에게 돈이 된다 - 영화 <마국 수정헌법 제13조>

  

영화는 삼진아웃 법이 발의된 배후에 알렉(American Legislative Exchange Council)이라는 사설단체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고발한다. 주요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는 알렉은 기업들이 제안한 법안이 정치인을 통해 발의되도록 일종의 재계와 정계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알렉에는 삼진아웃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민영 교도소 업체 CCA(Corrections Corporation of America, 현재 CoreCivic)가 회원으로 있다. 기본적으로 민영 교도소는 재수자의 규모에 따라 수익이 결정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삼진아웃 법의 도입으로 재소자 수와 수감기간이 늘어나면서 CCA 측은 수십억 달러의 이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CCA는 2010년 애리조나 주에서 통과된 신규 이민법(소위 SB 1070)을 배후에서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규 이민법은 애리조나 주의 경찰에게 불법 이민자들을 불심검문하고 체포 및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자 출입국관리소 구금시설은 체포된 불법 이민자들로 가득 채워졌다. CCA는 이러한 구금시설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1980년대, 1990년대의 마약과의 전쟁, 그리고 2000년대부터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교도소 산업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교도소들마다 넘쳐나는 재소자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교도소와 재소자들 밑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도소의 재소자 규모를 줄이기는 쉽지 않다. 범죄와의 전쟁, 그리고 범죄자 대량 투옥으로 막대한 이득을 본 회사들이 재소자의 수가 줄지 않게 하려고 필사적인 로비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사에는 민영교도소뿐만 아니라 교도소에 서비스와 물품을 공급하는 다양한 유형의 업체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통신업체는 재소자들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 때 높은 통화료를 부과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교도소에 급식을 제공하는 업체, 재소자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도 독점적이고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회사들은 더 많은 범죄자들이 더 오랫동안 교도소에 머무르도록 만드는 강력한 형사정책을 지지하며 입법과정에 정치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애쓴다. 기업인들에게 유리한 정책과 법안은 정치인 입장에서도 손해가 날 이유는 없다. 범죄와 관련된 이슈에 있어서만큼은 강경한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범죄학자 제프리 레이먼(Jeffrey Reiman)과 폴 레이튼(Paul Leighton)은 미국의 형사정책이 세 가지 측면에서 실패한 정책이라고 평가한다. 첫째, 범죄를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을 알면서도 이러한 정책을 도입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무수한 연구를 통해 밝혀진 가장 대표적인 범죄의 원인은 경제적 불평등, 빈곤, 실업, 총기 소지, 마약, 교도소 수감이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도입하는 대신 ‘무관용 정책’으로 대표되는 처벌 위주의 정책만을 고집하고 있다. 둘째, 가진 자들과 권력층의 위해한 행위를 중대한 범죄로 규정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사법기관은 권력형 범죄, 기업범죄 등 고위층의 화이트칼라 범죄에는 무관심하거나 관대하면서 하층민이 저지르는 생활형 범죄, ‘거리 범죄’만 집중하고 있다. 셋째, 사법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불평등 요소들을 제거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레이먼과 레이튼에 의하면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실패가 다분히 의도적이라는데 있다. 미국 정부는 범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마약과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가 벌여온 전쟁이 어쩌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 고의로 지고 있는 전쟁일지도 모른다고 이들은 말한다. 사회의 권력층과 가진 자들은 애초부터 범죄를 예방하여 보다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에만 몰두할 뿐이다. 그런데 패배하는 전쟁,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이어나가는 이유는 바로 그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알렉의 사례처럼 이러한 전쟁은 정치인들에게는 표를, 기업인들에게는 돈을 가져다준다. 전시상황을 유지하면 할수록 정치인들은 지지 세력을 결집하기에, 기업인은 이윤을 창출하기에 유리하다. 

  

하지만 전쟁이 주는 보다 근본적인 이익은 기득권층에게 득이 되는 지배체제를 유지하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일반 대중의 관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 경제적·사회적 모순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경제적 불평등, 삶의 질 저하, 고용 불안정, 사회보장 결핍 등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구조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범죄와의 전쟁이 내세우는 사태의 위급성과 심각성 앞에 힘을 잃어버린다. 

  

지배계층을 향해 쏘아 올려야 할 개혁의 요구는 소수의 하층계급 범죄자들에 대한 공포와 증오로 대체된다. 일종의 ‘공격 대상 전환’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위로부터의 위협을 아래로부터의 위협으로 전환하는 효과가 있다. 하층계급의 범죄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패배가 예정된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가운데 후방에서는 전쟁의 거의 유일한 승리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지배자들이 승리의 축배를 든다.




참고문헌

미쉘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나남, 2016)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최종철 옮김(새물결, 2005)

Jeffrey Reiman & Paul Leighton, The Rich Get Richer and the Poor Get Prison: Ideology, Class, and Criminal Justice(Routledge, 2016)

Georg Rusche & Otto Kirchheimer, Punishment and Social Structure(Transaction Publishers, 2009)

Stanley Cohen, Folk Devils and Moral Panics(Routledge, 2011)

Steven Box, Power, Crime and Mystification(Routledge, 1984)

Stuart Hall, Chas Critcher, Tony Jefferson, John Clarke, & Brian Roberts, Policing the Crisis: Mugging, the State and Law and Order(Macmillan Press,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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