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매거진 vol.4 게재
봄기운이 코끝을 간질이기 시작할 때쯤이면 어김없이 어린 시절 소풍날이 떠오른다. 소풍 가는 날 아침이면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준비했다. 분주한 칼질 소리에 잠에서 깨 부엌으로 나가 보면 식탁 앞에서 열심히 김밥을 말고 있던 엄마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일어났어?” 하며 나를 반기고, 김에 바른 고소한 참기름 냄새는 아침 햇빛에 반사된 먼지와 함께 온 집안을 둥둥 떠다녔다.
소풍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기는 동안에도 집안 여기저기를 부유하며 내 뒤만 따라다니는 것 같던 참기름 냄새가 온 신경을 부엌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김밥집에서 파는 김밥 한 줄 사다 손에 들려 보내도 뭐라 할 사람 하나 없었을 텐데, 전날부터 온갖 재료를 준비해 도시락을 싸는 엄마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들떠 보이기도 했다. 김밥을 써는 모습을 옆에 앉아 구경하고 있으면 엄마는 동그랗고 예쁜 김밥 하나를 집어 내 입에 넣어줬다.
어릴 땐 김밥에 꼬투리 없이 동그랗고 예쁜 부분만 있는 줄 알았다. 못생긴 꼬투리는 모두 엄마 차지였다는 걸 조금 더 크고 나서야 알았다. 어린이 요리책에 나온 쇠고기달걀튀김은 소풍 도시락의 단골 메뉴였다. 잘 삶은 달걀을 곱게 다진 쇠고기로 단단히 둘러싸고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튀겨내는, 생각만해도 번거로운 요리다. “엄마, 나 이거 먹고 싶어!”라는 말 한마디에 엄마는 그 귀찮은 메뉴를 소풍날마다 만들어 도시락에 담아줬다. 알록달록한 3단 도시락의 1층엔 김밥이, 2층엔 쇠고기달걀튀김 같은 특별 메뉴가, 3층엔 과일이 가득했다.
친구들과 모여 앉아 엄마가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 뚜껑을 열 때면 절로 우쭐해지곤 했다. 소풍날 친구들 앞에서 도시락 뚜껑을 여는 일은 나에겐 늘 설레는 일이자 자랑이었다. 비단 소풍날 뿐 아니라 엄마는 마치 내 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처럼 내가 먹고 싶다는 건 뭐든 만들어 주었다. 스치듯 혼잣말처럼 먹고 싶다 이야기한 음식조차 다음 날이면 밥상 위에 올라오곤 했을 정도다. 엄마는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일을 삶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적어도 어릴 땐 그렇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분명 부엌에 있는 걸 즐기는 거라고,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보다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일을 더 즐거워하는 거라고 말이다.
때때로 생각해보곤 한다. 그 시절 엄마의 부엌이 어떤 공간이었는지를. 새벽잠을 애써 떨쳐내며 정성껏 차려놓은 아침상을 쳐다 보지도 않고 집을 나서는 딸이 미워지는 날에도, 따뜻한 사과 한마디 건넬 줄 모르는 무뚝뚝한 남편과 부부싸움을 한 다음 날에도 엄마는 말없이 부엌에 서서 자식과 남편을 위해 요리를 했다. 가족이 모두 나가고 텅 빈 집을 홀로 지키던 엄마의 마음 한 편에 자리했을 외로움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살아오다 오늘에야 슬그머니 꺼내 들여다본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은 뒤에야 엄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엄마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닭고기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아빠가 죽고 못 사는 생선회는 입에도 대지 못하며, 오빠가 열광하는 제육볶음은 평생 안 먹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족 중 누구도 엄마의 기호에 대해 궁금해한 사람이 없었기에 엄마는 눈 감고도 닭 한 마리를 손질할 수 있고, 수준급 회 뜨는 실력을 지녔으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제육볶음 레시피를 보유한 사람이 됐다.
자장면이 싫다던 엄마의 말을 의심 없이 믿어버린 유행가 가사 속 어리석은 가족들처럼, 무심한 자식과 남편에 의해 엄마의 기호가 결정되던 시절이 우리 가족에게도 존재했다. 어느새 부쩍 자란 나는 이제 웬만한 요리는 엄마에게 만들어줄 수 있다. 온갖 번거로운 과정을 겪어가며 요리를 하다 보면 그 시절 엄마가 왜 가장 맛있고 고운 부분만 우리에게 양보했는지, 왜 동그랗고 예쁜 김밥만 내 입에 넣어줬는지 깨닫게 된다. 요리를 한다는 게 그런 것이었다. 곱고 예쁜 것만 내놓게 되는,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줬으면 하는 애틋한 마음.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다.
이제 다 자란 나는, 아니 아직도 자라야 할 마음이 많이 남은 나는 엄마의 마음이 이러이러했으리라 짐작만 해볼 뿐이다. 부엌에서 엄마의 도마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날이 왔을 때, 나는 그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가만히 생각해보곤 한다. 엄마가 만든 김치가 먹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엄마의 된장찌개가, 엄마가 맨손으로 꼭꼭 말아 싼 김밥이 먹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소풍날의 도시락에 가득 눌러 담아주던 엄마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이런 생각에 잠기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근화 시인이 김밥에 대해 쓴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내용 그대로 제목까지도 ‘김밥에 관한 시’다.
“엄마 옆에 앉아 계란도 깨주고 깨소금도 뿌려주던 때가 있었다. 꼬투리 먹으면서 뭐 이렇게 맛있는게 있나 했는데 김밥 마는 날이면 새벽 네 시에 일어나던 엄마는 이제 다 늙어서 일곱 시 여덟 시까지 자도 된다. 김밥이 그립듯 엄마가 그리우면 속이 정말 아플 것이다. 그럴 것이다.”
엄마는 가끔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식탁 위에 가득 차려놓으며 “엄마밖에 없지?” 하고 묻는다. “응, 엄마밖에 없어.” 내 대답에 엄마는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