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아이를 품고 막 입덧이 시작되었을 때 홀로 친정에서 지내야 했던 나는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남편이랑 알콩달콩 노닥대며 살고 있었으면 모를까, 부모님께 한여름에 딸기가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릴 수도, 속이 울렁거린다고 짜증스럽게 앙탈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즐겨 먹던 음식에 비위가 상하고 생전 안 먹던 음식에 식욕이 당겨도 애써 내색하지 않은 채 생애 첫 입덧을 조금은 서럽게 치러내고 있었다.
그러다 정 속이 울렁거리면 흰쌀밥에 초고추장을 드뿍 넣어 비볐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그저 하얗게 윤이 나는 따뜻한 쌀밥에 쨍하게 빨간 초고추장을 얹어 비벼내면 밥 한 톨 한 톨에 알싸한 고추장 향과 설탕의 달달함, 식초의 시큼함이 알맞게 베어 든다. 이때 통깨를 잔뜩 뿌려주면 단출한 비빔밥이 활기 있게 살아나는데, 새콤달콤함에 은은한 고소함이 가미된 그저 "쌀밥에 초고추장"은 임산부의 메스꺼운 속을 달래주곤 했다. 맨밥에 그냥 고추장도 아니고 초를 쳐서 갠 고추장이라니. 혀끝이 자르르하게 톡 쏘는 새콤함이 행여 달아날까 달걀 하나 넣지 않고 비벼댄 걸 보니 맛에 대한 감각이 독특해지긴 했었나 보다.
그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자라서 5살 무렵이 된 즈음 나는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응당 30분 정도는 일찍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군기가 바짝 든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운전까지 초보인 데다가 출근길 교통체증이 심한 구간을 지나쳐야 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이런 탓에 아이까지 덩달아 고생이었다. 잠에 취한 아이를 겨우 옷만 입혀서 어린이집에 보내곤 했는데, 아침밥도 못 먹은 채 비몽사몽 중에 선생님에게 건네진 5살 꼬맹이가 안쓰러워 아이 가방에 아침 도시락을 챙겨 넣기 시작했다.
신입사원의 포부만큼 도시락에 대한 열정도 꽤 다부졌던지라 처음엔 이런저런 다양한 메뉴와 그럴싸한 플레이팅으로 예쁘게 포장해 들려 보냈지만, 결국 내가 가장 많이 만들어 보낸 건 간편한 레시피의 "달걀 간장 비빔밥"이었다. 이 역시 단출한, 밥과 비빔의 만남이다. 김이 폴폴 나는 따끈한 쌀밥에 취향껏 익힌 달걀 한 장, 그리고 간장과 참기름이면 충분하다. 달걀 위에 떨어진 까만 간장이 뽀얀 밥에 알알이 스며들어 캐러멜색으로 한데 어우러진다. 그리고 마침내 진한 고소함으로 무장한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미처 맛보기도 전에 그 향에서 절정에 달한다. 후드득 털어낸 볶은 깨와 짭조름한 김 가루를 고명으로 얹어내면 맛도 모양도 한층 풍성한 달걀 간장 비빔밥 완성!
가끔은 비빔밥의 모양을 달리했다. 밥을 베이스로 한 "비빔의 재료"와 "장의 종류"가 자유로우니 거리낄 것이 없다. 달걀 비빔밥을 간장 대신 케첩으로 비벼 맛의 변화를 주기도 했고, 제사를 지낸 다음 날엔 나물을 잔뜩 얹어 나물비빔밥을 만들어 주었다. 불고기감을 사둔 날엔 프라이팬에 고기를 들들 볶아 불고기 비빔밥을 해주었고, 어떤 날은 푸릇한 새싹채소를 얹어 상큼한 비빔밥을 만들어냈다. 아이의 아침 도시락을 위해 나는 그렇게 많은 것을 비벼댔다. 온종일 떼어놓아야 하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간편하지만 영양가 있는 아침을 챙겨주고 싶은 엄마의 사랑과, 도시락을 싸면서도 연신 시계를 쳐다보며 분 단위로 아침 시간을 쪼개던 워킹맘의 출근 걱정까지, 여러 겹의 의미를 켜켜이 쌓아 넣어 비비고 또 비볐다.
남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지금, 이제는 문득 한국이 그리워질 때마다 비빔밥을 만든다. 마음이 텅 비어 허전하거나 온전한 내 편이 없는 것 같이 서운한 마음이 들 때면 커다란 양푼을 꺼내 들곤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온통 때려 넣어 박박 비벼낸다. "때려 넣다"라는 억센 표현과 "박박" 거칠게 비비는 행위에서 얻어지는 쾌감을 즐기고 난 후 한바탕 게걸스럽게 "우적우적" 씹어 삼키며, 세련되지 않은 평범한 얼굴을 한 엄마 같은 비빔밥에서 그리움에 대한 위안도 함께 넘긴다.
가끔은 하나하나 정성껏 만들어낸 다채로운 고명을 따뜻한 쌀밥에 가지런히 얹어 낸다. 고상하고 기품 있는 한식당에 초대받은 것처럼 비빔밥 한 그릇으로 집구석 아줌마의 지위를 스스로 드높여본다. 대충 비벼 먹다가도 우아한 모습으로 자유롭게 형태를 바꾸는 비빔밥은, 예스러운 "전통"이나 한국만의 "고유한 식재료"라는 고고한 단어로 레시피를 옭아매지 않아 더욱 좋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외국에서 구할 수 있는 식료품으로 형형색색 모양을 내어 그럴듯한 비빔밥으로 나를 대접한다.
비빔의 재료들이 밥과 한데 섞이면서 익어간다. 마침내 하나로 어우러져 맛의 조화를 이룬 비빔밥을 한 술 뜨며, "비비다" 그 자유로운 단어가 주는 가장 익숙한 한국의 맛을 음미해본다.